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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문화상 우수상-문학평론]정착의 조건 - 노혜봉의 시세계
  • 신승민(한양대학교 한국언어문학과3)
  • 승인 2014.12.04 21:23
  • 호수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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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정의 시작
생生의 길고 긴 노정 위에서 사람은 길을 걷는다. 그 길은 딱딱 들어맞는 블록으로 포장된 정연한 보도步道일수도 있고, 빛나는 옥석으로 윤색된 대로大路일수도 있다. 때론 이정표 하나 없어 갈피를 잡기 어려운 벌판이거나 험준한 산간벽로山間僻路일수도 있고 끝없이 황량하여 막연하고 답답한 사막일수도 있다. 사람은 그 천양지차의 길에서 오욕과 영광을 맛보며 울고 웃는다. 문제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그 인생길의 희로애락이 지니는 비율이다. 그 비율이란 마치 형상과 체계를 종잡을 수 없이 무른 진흙 점토와 같다. 되는대로 변모하면서 사람의 인생길을 어지럽히는 화복禍福의 비율. 슬프게도 기울고 어그러진 그 영욕의 비율 속에서 사람은 혀를 깨물어 울음을 삼키는 순간이 더 많다. 그래서 인생길을 걷다보면 혈기의 격동으로 숨 가쁜 환희의 나날보다도 천길 벼랑 같은 절망에 가슴 치며 괴로워 할 때가 더 많다. 수놓은 비단이 평탄하게 깔린 듯 아름답게 보여도 복병처럼 숨어 있는 생의 좌절과 시련. 길목마다 도사린 가시덩굴과 돌부리를 쳐내며 가야하는 사람은 힘들다.
그렇게도 힘들고 괴로워 쉽게 지치는 생의 도정. 그러나 사람은 그 길을 다시 일어나 꿋꿋이 간다. 묻은 먼지 툭툭 털고, 흘리는 피땀 애써 닦고 저 멀리 한줄기 빛을 향해 간다. 보람을 위해 간다, 정착을 위해 간다. 방황과 번민을 그치고 자신이 바라는 이상理想에 정착하기 위해 사람은 끝없이 인생길을 걷는다. 정착의 목적지, 그 찬란한 이상을 하나의 집이라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이 웅장하게 늘어진 대궐의 전각이든 짚대로 엮은 초막 움집이든 그 하나의 목표를 정하여 향하는 당사자에겐 전혀 상관이 없을 것이리라. 아늑한 평온에 족하고, 보람의 만족에 심취된 사람에겐 소박한 단칸도 임금의 편전일 것이다. 그와 다르게 입신과 영달에 과녁을 두고 걷는 사람에겐 커다란 세도의 궁성이 자신의 정착을 위한 이상적인 목적지가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각자가 원하는 정착지들의 천차만별함이 아니라, 그 인생길, 여정의 시작에서 가다듬는 사람의 준비 자세와 마음가짐이다. 도달하고자 하는 꿈과 이상이 크든 작든 상관없이, 그 어떤 것이든지, 그것에 목적을 두고, 정착을 위해서 가는 길이라면 사람은 마땅히 철저히 준비해야 하고 만반의 태세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그런 여정의 시작 지점에서 시인 노혜봉은 시적詩的 지평을 제시한다. 그 시적 지평이란 바로 정착의 조건이다. 자신이 애타게 바라는 그 하나의 방향에 정착하기 위해서 열심히 길을 걷는 자들 그리고 좌절하여 털썩 주저앉거나 정처 없이 부유浮游하는 자들에게 귀감과 충고가 될 만한 그녀의 시편들은 하나 같이 묵직하다. 화자로 시화詩化된 시인은 그 시세계 속에서 아슬아슬한 캄캄 절벽 아래 은은한 미소 같은 봄빛을 보고, 고결하게 짙푸른 산을 통해 명리名利에 얽매이지 않는 융숭함을 느끼고, 진실 된 거울처럼 맑고 깨끗한 마음가짐의 바탕을 말한다. 그것은 인생 전체를 일관하지 않은 사람이 쉽게 뱉을 수 없는 말이다. 오로지 오랜 통찰과 깊은 사유, 그리고 풍부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달관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사람이 바라는 곳에 정착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쓰라리고 지난한 일이다. 그래서 시인이 말하는 정착의 조건은 결코 가볍지 않고, 결코 녹록치 않다.
그렇다고 시인이 알쏭달쏭한 선문답禪問答 같은 언어조화로 허황된 변설을 늘어놓았을 리 만무하다. 관건은 시를 음미하는 자세다. 심안을 열어 깊게 들이마셔야 볼 수 있는 노혜봉의‘진국 시편’속에서 우리는 인생길 여정을 읽고 정착의 조건을 살필 수 있다.

2. 길목을 지나며 -「비단길 한가운데, 삶이란」
수천 번 새털구름을 보며 푸른 하늘을 보며 힘주어 올렸을,
오래 전 무덤 속에 파묻혀 지워진 길, 오! 아름다운 모래톱들,
멀리 저 높고 낮은 산의 능선들, 저녁 노을빛에 물든 끝 없는 모래모래모래산
가자 가야만 한다 낙타야 일어서라 낙타야 술 취한 듯 가자 황량한 바람이 회초리질로 나를 내리친다 지워진 길을 찾으며 돌아보지 말자 모래 회오리질이 나를 강타한다 모래바람이 끝내 나를 일으켜 세운다 한 걸음 한 걸음 새 길을 다지며 가자
낙타는 모래에 잡히고 사람은 말에 묶인다
저 멀리 초승달이 낸 희스므레한 길 너머로 보이는 새하얀 하늘
-「비단길 한가운데, 삶이란」全文

동서東西 문물 교류의 통로이자 동아시아의 문명을 발전시킨 실크로드 교역로는 정치와 사회, 종교와 문화의 장을 넘나들며 역사적으로, 예술적으로 무수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장소이다. 그곳에는 불교의 역사적 보고라 할 수 있는 둔황을 비롯한 여러 가지의 유물과 사적들이 보존되어 있다. 또한 지금까지 발견, 발굴된 문화유산들도 실체의 전부는 아니기에 실크로드 사적유산史的遺産의 총체와 총량은 아직도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무궁하다.
그렇게도 찬란한 신비로움이 아로새겨져있는 실크로드 비단길을 사람이 걷는 인생길에 비유할 수 있다면, 우리 삶의 본질은 쉽게 윤곽이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인생길 여로의 과정, 그것은 마치 동서양이 교역을 하고 친분을 맺듯 새로움과 만남에 대한 가슴 뛰는 동경이고, 미지의 순간으로 발을 옮기며 상대와의 교감을 기대하는 설렘이다. 걷는 길 위에는 유유히 떠가는 한 조각‘새털구름’이 있고, 그 구름이 노니는‘푸른 하늘’이 있는 영롱한 풍경의 연속이다.‘무덤 속에 파묻혀 지워진 길’을 닦아내어 걷는 개척의 노정 주변에는‘아름다운 모래톱들’과‘높고 낮은 산의 능선들’이 사람의 생을 비춰주듯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그러나 어찌 사람의 인생길이 끝까지 태평대로太平大路의‘비단길’일수만 있겠는가. 인생길을 걷는 사람의 순간순간은, 뚜벅뚜벅 낙타를 타고 서역국으로 떠나는 이름난 거상巨商처럼, 일대의 가솔들을 이끌고 실크로드를 호령하는 중원의 부호富豪처럼, 황금빛으로 찬연한 보람만이 가득한 것이 아니다. 밝은 전망과 미래를 향한 힘찬 도약만이 일렬종대一列縱隊한 것이 아니다. 곳곳에 숨겨진 문명의 아름다운 비밀들, 그 바탕에는 그것들을 하나로 품어 안는 사막이 자리 잡고 있다. 사막에는‘끝 없는 모래모래모래산’이 험산준령처럼 버티고 있다. 그 사막은‘황량한 바람이 회초리질로 나를 내리’치는 삼엄한 곳이고‘모래 회오리질이 나를 강타’하는 살벌한 곳이다. 실크로드 그 아득한 사막의 한 가운데에선 승승장구하는 거상도 도적의 약탈을 피할 순 없고, 부귀탐락富貴耽樂하는 부호도 사나운 독충의 습격과 모래폭풍을 막을 순 없는 법인데, 하물며 우리 인생길은 어떻겠는가.
고난과 좌절이 살수殺手처럼 음험하게 매복한 그 비단길, 인생길. 그래도 사람은 그 길을‘가야만 한다’. 우리 모두 넘어진 사람들을 일으키고, 지친 사람들을 부축하고 그 길의 노정 위에서‘가자’고 소리쳐야만 한다. 사람의 포기를 재촉하듯 발이 푹푹 빠지는 사막의 모래밭, 가시밭 길목이라도 자신의 꿈과 이상을 향한 정착을 위해서라면 그 길을 걸어야만 하는 것이 생의 숙명이다. 그리고 그렇게 험난한 길일수록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입술 타는 긴장만을 새기며 갈수는 없다. 첨예한 모서리처럼 딱 부러지게 사막의 인생길을 걷다가는 피곤에 스스로가 지쳐서 모래늪에 엎어져 나뒹굴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 길은 마치‘술 취한 듯’휘영청 또 휘영청 가야하는 길이다. 그 길은 온몸의 털이 바짝 얼어붙듯 정신과 감각을 초집중하여 이것저것 따져 묻고, 이리저리 계산하고, 손익가감 세어보며 가는 첨단기계의 길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흥청망청 주사와 난동을 부리며 발 가는 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비틀대며 가자는 뜻은 아니다. 사람은 마치 주량에 맞는 간단한 반주를 즐긴 것처럼‘적당한 자기최면’그리고‘적절한 자기안정’을 도모하며 인생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네 삶은 때때로 날카로운 신경과 까다로운 쟁론으로 인하여 선線을 넘어서서 간섭하고, 도度를 지나쳐서 염려하고, 길道을 이탈해서 걸어갈 때가 있다. 그래서 복잡하고 짜증나는 생의 순간순간이 있다. 그럴 땐 이룸과 실패를 떠나서 뒤를 자꾸 돌아보는 미련을 그쳐야 하고 부질없는 한탄과 후회를 버려야 한다. 그리고 다‘돌아보지 말자’고 외쳐야 한다. 발자국 새기며 지나간 길은, 발자국 남겨진 과거의 일로 남겨두고, 앞으로 남은 길에 전념해야 한다. 이제 내가 다가서야 할 지점으로, 저 멀리 빛나는 희망에 정착하기 위한 여정을 다부지게 시작해야 한다. 길 곁으로 수놓아져 있는 자연을 품고, 자신을 다잡고 가야한다.
시 속에서 화자로 하여금 그러한 깨달음을 자각하게 만드는 존재들은 앞서 하나같이 사람의 걸음을 괴롭혔던‘황량한 바람의 회초리질’이고,‘모래 회오리질’이며,‘모래바람’이다. 그것은 화자에게 고통을 부과하는 생의 적수이자 깨우침을 선사하는 매서운 편달鞭撻이다. 우리네 인생은 여로의 과정 속에서 시련을 겪고, 공포를 느끼고, 끝없는 어둠의 나락에 곤두박질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절망과 함께 나타나는 것은 원인 모를 책망이다. 그 책망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앞으로의 도정 완주, 방향 정착의 성패가 결정되는 것이다. 화자는 시 속에서 안으로, 안으로, 생애의 책망과 여러 고난을 감내하며 마음가짐을 가다듬는 양분으로 체화시키고 있다. 화자는 말한다,‘모래바람이 끝내 나를 일으켜 세운다’고. 그리고 그렇게 숱한 난국을 겪으면서도‘한 걸음 한 걸음 새 길을 다지며 가자’고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도저한 인생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차분한 일관과 강한 의지의 면모일 것이다.
‘한 걸음 한 걸음 새 길을 다지며’가는 사람의 인생길에서‘낙타는 모래에 잡히고 사람은 말에 묶인다’. 견디기 힘든, 말만 그럴싸한 비단길 같고, 속은 고초의 산실과도 같은 사막, 그것이 우리네 인생길의 현실이다. 차마 형용할 수 없이 힘겨운 길이다. 그러나 앞으로 남은 길목 그 선상에는‘저 멀리 초승달이 낸 희스므레한 길 너머로 보이는 새하얀 하늘’이 있다. 하나의 줄기로 뻗어지는 지평 그 속에 빛남이 있다. 비록 모호하게‘희스므레’할지라도,‘새하얀 하늘’은 마치 희망의 이불처럼 우리 생의 여정을 창공 위에서 포근하게 덮어주고 있다. 그런 전망이 있기에 우리는 사막 같은 인생의 길목을 지날 수 있다. 전망을 향해, 이상을 향해 정착한다는 그 소망과 믿음을 품고 우리는 인생길 위에서 걸음을 떼는 것이다.

3. 초연하게, 편안하게 -「무명無名」
산이 된다는 것은
우뚝 솟은 바위에 등을 기대 보는 것
한껏 목은 뒤로 젖힌 채
그냥 숨을 편히 내쉬어 보는 것

산이 된다는 것은
깊숙이 뿌리를 묻고
단단한 나무 주름에 가슴을 묻고
구름바다를 아득히 감싸 받는 것

나뭇가지에서 가지로
잎사귀의 이슬을 털며
한 그루의 하늘을 열어보는
하늘다람쥐를 따라잡는 것

두 뺨에서 목주름에서
지친 땀방울이 씨앗으로 여물 때
발바닥이 신창으로 떨어질 때
그늘 아래 내가 스러질 때

산아! 멀리 있어 더 희푸른 산아
하늘 주름 펴고 한 발 물러서라

산이 된다는 것은 빙벽 위
한 그루 소나무 발아래에서
첫 송이 송화는 가볍게
마른 꽃가루로 떨어져, 네 속살
바람무늬에 아슬히 숨을 쉬어 보는 것
-「무명無名」全文

영욕이 교차하는 생의 길목을 지나면서, 마침내 자신이 바라는 전망과 이상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바야흐로 무명無名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시 속 화자는 말하고 있다. 무명의 길, 그것은 결코 노장老莊의 세속 초탈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 옛날 죽림칠현의 뜬구름 잡듯 하는 기이한 변설을 말함이 아니다. 다시 말해, 그런 처세의 방책으로 화자는 무명을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명으로 살아가는 인생길이란 무엇인가? 그야말로 산간벽지에 틀어박혀서 조용히 살아야 한다는 청풍명월의 귀거래사를 읊는 것인가? 
아니다, 무명, 그것은 우리네 근처에 있는, 인생길 어디서나 볼 법한‘저기 저 산처럼’사는 것이다. 자연의 초목처럼 사는 것이다.‘빙벽 위’의 삶처럼 녹록치 않은 인생길에서 우리 스스로가‘한 그루 소나무’가 되어‘첫 송이 송화는 가볍게’떨구고,‘깊숙이 뿌리를 묻고’‘산이 된다는’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산이 된다는 것은’무엇을 말함인가? 준엄한 태산처럼 웅대하게 천하를 주름잡으며 살아야 한다는 장부의 포부를 말함인가 아니면 늘어진 산맥처럼 품안에 세상을 넣고 즐기는 고고한 초월을 말함인가? 아니다, 산이 된다는 것은,‘우뚝 솟은 바위에 등을 기대 보는 것’이요‘한껏 목은 뒤로 젖힌 채/그냥 숨을 편히 내쉬어 보는 것’이다. 이것은 정녕 쉬운 일인가? 과연 그러한가? 누구나 인생길을 걷다보면 산자락을 오를 때가 있다. 비탈길에서 헉헉거리다 잠시 바위에 등을 기대고 숨을 고르고, 땀을 식히며 뒤로 목을 젖혀 쉼 호흡 크게 한 번 하는 것은 참으로 쉽고 보편적인 일이라 느껴질 수 있다. 말 그대로‘평범한’일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평범한 일인가? 산을 오르는 것은 그렇다 쳐도, 산이 된다는 것이 쉬운 일인가? 산처럼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인가? 가시철장 천지인 인생길에서 한 줄기 전망의 빛을 향해 힘겹게 땅을 다지고 또 다지고 걷는 사람에게 산처럼 산다는 것이 어찌 쉬울 수가 있겠는가? 숨을 편히 내쉰다, 누군가 그것이 우리네 인생길에서 쉽다고 여겨진다면, 그 사람 인생, 그것이야말로 축복받은 삶일 것이리라. 우리는 대부분 인생의 여정을 터벅거리며 걷는 와중에 숨 막히듯 괴로운 순간을 여러 번 느낀다. 그렇게 고통스럽고, 답답하고, 복잡하고, 미묘하고, 알 길 없는 순간 속에서 산처럼 살 듯 무명의 길을 걷는 것은 참으로 버거운 일이다.‘깊숙이 뿌리를 박고’‘단단한 나무 주름에 가슴을 묻고’아늑한 평온과 차분한 평정을 유지하며, 끝내 안정된 정착을 획득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는, 도회를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 중 어느 누구를 붙잡고 물어봐도 다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이 무명이라는 말, 이름 없이 산다는 것은 순진하게 나 자신을 구태여 드러내지 말고 둔한 범부처럼 살라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앞서 계속해 말한 것처럼‘산처럼’‘자연스럽게’‘초연하고 편안하게’사는 것이다. 우리는 마침내 정착하여‘편안하게’살기 위해서‘편안하게’인생길을 걸어야 한다. 돌부리처럼 뾰족하고, 가시처럼 옹졸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산처럼 대범하게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산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연의 부분이자 자연의 총체이다. 육해공을 망라하여 본다면 산은 저 작은 점하나, 그야말로 하나의 융기된 육토陸土조각일 따름이다. 그러나 산 자체를 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산의 그 거대한 풍채는 음양오행의 신묘한 조화가 하나로 이루어진 곳이다. 동식물, 산천초목이 서로 어우러지며 공생하는 곳이고, 그 배경의 바탕에는, 가령 배산임수로 예시들 수 있는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의 화합이 구현되어 있는 곳이다. 그런 산의 위대성을 인식할 수 있다면 무명의 산처럼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실감할 수 있다. 그래도 우리는 그런 길을 가야만, 그렇게 인생길을 걸어야만 무사히 우리가 바라는 이상과 전망에 정착할 수 있다. 인생, 그것이 어찌 평탄한 대로를 걷듯 쉬울 수 있겠는가! 그렇듯 시인이 제시하는, 화자가 말하는 무명의 길, 산처럼 사는 길, 그것으로 표현되는 정착의 조건이란 만만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반복하여 말하지만 그 무명의 길, 산처럼 사는 길이라는 것은 굳이 억지로 은둔하여 사는 세속 초탈의 길이 아닌‘모든 것이 그저 그렇듯’초연하게 사는 길이다. 초탈하여 사는 것과 초연하게 사는 것은 엄연히 다른 법, 하나는 완전히 벗어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중용을 유지하는 길이다. 초연하게 산다는 것, 그것은 중용을 유지하는 길이다. 적절하게,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다.‘나뭇가지에서 가지로’‘잎사귀의 이슬을 털며’자연과의 교감을 느끼고, 평정심을 잃어버리지 말고, 동요하지 않으며 사는 것이다. 그것은‘한 그루의 하늘을 열어보는’초목의 넓디넓은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는 것이며,‘구름바다를 아득히 감싸 받는 것’처럼 내적인 충만을 이룩하는 것이다. 허황된 허례허식虛禮虛飾에 집착하지 않고 외적인 부귀명리富貴名利의 속박에서 벗어나‘마른 꽃가루로 떨어져, 네 속살/바람무늬에 아슬히 숨을 쉬어 보는 것’처럼 진실 된 무명으로 사는 것이다. 
또한 진심을 다해 노력하여 흘린 땀방울이 소중한 결실을 맺는 것,‘두 뺨에서 목주름에서’흘러나와‘지친 땀방울이 씨앗으로’여무는 그런 보람된 충족을 느끼는 것이 바로 무명의 삶이다. 그렇게 인생길을 걸어간다면, 초연하게 정착하여 살아간다면 비록 무명으로 남아‘그늘 아래 내가 스러질 때’도 진정 편안할 수 있을 것이다.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4. 무색無色의 초심 -「바탕 거울」
애초에 물을 잘못 들인 옷감은
물이 잘 빠진다
맑은 물에 헹구어도 헹구어도
엷은 색이 자꾸 빠진다
꼭 비틀어 짬질을
뽀드득 소리가 날 때까지 짰어도
아차! 깜빡 잊고 옆에
흰 수건이나 속옷을 놓았다 하면
영락없이 제 살붙인 줄 알고
아낌없이 색을 내어 준다

어찌 하랴 본디 무색無色이 되기란
이리 어려울 줄이야
희부연 저 한치도 보이지 않는
안개 같은 젖빛
젖빛 속으로 젖빛 속으로
바닥이 나달나달하게 닦는 옷거울
저 무색無色의 가벼운 허우적거림으로
                                         -「바탕 거울」全文


누군가 자신이 갈망하는 이상과 전망, 꿈과 희망에 무사히 안착하고 마침내 정착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황량한 모래벌판에서 매서운 폭풍도 만나보고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워 혹독한 현실도 감내해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외양과 뽐냄에 집착하기 보다는 자연스러운 무명으로, 의젓한 산처럼 살아가며, 초연하게 인생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정착 조건들의 완성은 바로 하나의 순간, 걸음을 떼는 그 무색無色의 순간으로부터 시작된다. 
앞서 계속해 말한 것처럼 인생길을 걷는 사람이 의연하게 현실을 받아들이고, 초연하게 무명의 산처럼 살아간다는 것은 쉽고 또 가벼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이번 시편의 제목처럼 나의 바탕이‘거울’처럼 맑고 진실다워야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바탕이 어떻게 하면 깨끗한 거울이 될 수 있겠는가? 그것의 시작은‘무색’으로부터 출발한다. 무색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앞서 무명을 피상적으로 이해한 것처럼 말 그대로 색깔 없이 산다는 것인가? 사람이 인생길을 걸어갈 때 독특한 개성을 지니거나 또는 남들과 사회에 튀는 언행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으면 절대 안 된다는 것인가? 속되게 표현하자면,‘묻혀서’살아야 한다는 것인가? 그런 메마른 껍질적인 해석보다는, 일단‘가벼운 허우적거림’이라는 시적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가벼운 허우적거림’. 구구하게 이어지는 1연의‘무색 되기의 어려움 토로 과정’과 2연에 화자의 속내가 밝혀진 절절한 말들은 모두 저 한 줄의 종장에 집약되어 오롯이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가볍게 허우적거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1연에서 옷감, 수건, 속옷 등을 언급하였으니, 그리고 2연 6행의 옷거울이라는 표현을 참고한다면, 빨랫줄에 걸려서 바람에 나부끼는 옷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세제 광고에 나오는 그런 새하얀 셔츠를 예상하며, 시에서 말하는 무색의 본질이란‘무결한 순수함’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누누이 말하지만, 그런 피상의 해석으로는 시에서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내적인 본령을 읽어낼 수 없다. 시의 해석이 사람에 따라 구구각색임은 틀림이 없고, 그런 해석의 방법에 어떤 정답이나 왕도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특정하게 단일한 주제를 잡고 그것을 일관시켜 하나의 텍스트로 꿰어 올려야 하는 비평 작업에서는 좀 더 심층적인 시적 맥락을 통찰해야 하는 법이다. 아까 말한 것처럼 정착의 조건에는 무명의 산처럼 살아가는 자세가 포함되어 있다. 그것을 엮어서 생각해본다면 저‘가벼운 허우적거림’이라는 표현이 담고 있는 맥락이란‘자잘한 것들에 얽매이지 않는 겸허한 마음가짐’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거칠게 허우적거리는 것이 아닌, 가볍게 허우적거리며 세간의 어지러움을 피하는 것, 그것을 더 나아가서 생각해본다면‘경직된 속박에서 벗어나 내면의 자유와 평정을 찾는 자세’라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렇게 가볍게 허우적거리는, 무색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희부연 저 한치도 보이지 않는/안개 같은 젖빛/젖빛 속으로 젖빛 속으로’헤엄쳐 오르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화자는 계속해‘젖빛 속으로’가야함을 말한다. 앞을 분간할 수도 없는 안개 같은 젖빛 속을 헤치며 가야함을 말한다. 그렇다면 사람이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그 젖빛이야말로 무색의 본질이라는 것인가? 그 젖빛을 젖가슴의 빛으로, 우윳빛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모성母性과 연결되어 있다. 모성은 모체母體, 즉 만물의 근원과 상통하는 맥락을 지니고 있다. 모체의 상징, 모성의 상징으로 볼 수 있는 그 젖빛을 향해 가야 무색에 도달할 수 있다는 그 말인즉, 다시 초심初心으로 회귀하라는 의미와도 같다. 만물의 근원이 자리 잡고 있는 최초의 상태로 되돌아가 초심을 잃지 말고 자신을 가다듬으라는 말과도 같은 것이다. 사람의 초심이란 주체적 결단이 시작되는 곳이고, 결코 부화뇌동하지 않는 출발의 순간이라 말할 수 있다. 초심을 지닌 자만이 가볍게 허우적거리며 내적인 자유와 평정, 조화를 유지할 수 있고 세간의 훼예포폄毁譽褒貶에 구속되지 않을 수 있다. 우중愚衆의 어불성설語不成說에 흔들리지 않고 이상을 향해 정착할 수 있다.
갈 길 바쁜 인생의 여정에서 주변의 선동과 음지의 현혹에 말려드는 것은 무턱대고 색을 받아들이는 옷감들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다수를 혹세무민하여 그들로 하여금 부화뇌동하게 만드는 것은‘애초에 물을 잘못 들인 옷감’으로 볼 수 있다. 흔히들 세탁 시에‘검은 빨래, 흰 빨래 따로’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다른 옷감에 하나의 색이 옮겨 붙어 더럽혀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시의 표현처럼‘애초에 물을 잘못 들인 옷감은/물이 잘 빠진다’.‘엷은 색이 자꾸’빠져서‘꼭 비틀어 짬질을’해봐도‘흰 수건이나 속옷을 놓았다 하면’‘아낌없이 색을 내어 준다’. 지금 시 속에서 화자는 일부러 색을 내줘서도, 냉큼 색을 받아서도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것들 모두가 순결한 젖빛의 모성, 최초의 경지, 자유로이 허우적거리는 사람의 초심을 위해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평정과 조화 그리고 노정의 근본을 망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처음의 마음을 다시 가슴에 되새겨야만 나의 바탕이 모든 것을 가감 없이 비춰주는 고결한 거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화자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최종의 정착을 위해, 초연한 무명의 산처럼 인생길을 걷는다는 것은, 그 걸음 하나하나가 무색의 초심을 간직하고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시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5. 겸손으로 정착하다 -「봄빛절벽 그 아래엔」
겨우 머릿속이 환해진다. 기다려 보자 캄캄해질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려 보자. 캄캄해진다는 것은 사방이 어두운 벽으로 캄캄하게 눈을 감는 일, 내 어두운 눈길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일, 정신이 조금씩 한 곳으로만 길을 어슴푸레 트는 일. 등을 꼿꼿이 세우고 눈을 조금은 아래로 뜬 채 그 아래를 심중을 들여다보며, 혼신渾身을 다해 나아가는 일. 캄캄절벽 그 아래를 무릎 후들거리며 떨며 나를 낮추어보는 일. 바로 등 뒤는 생각하지 말자. 섣불리 한 발짝 내디디리라 다짐도 하지 말자. 우두커니 캄캄절벽 눈을 감고 기다리자.
감감한 절벽 그 아래, 하늘하늘 거기 한 그루 진달래 환한 꽃송이 혼신을 다해 바람에 흔들리다, 그 분홍잎 오롯이 하늘 보다가, 나와 딱 눈 맞춤하는 눈짓하곤, 그 입술하곤, 바로 수막새 떠오르는 달덩이 옛 신라인의 미소라니!
-「봄빛절벽 그 아래엔」全文

앞서의 이야기를 종합해보자면, 인생의 여정에서 사람은 최종의 이상에 정착하기 위하여 모래바람 같은 현실의 시련을 의연히 감내해야만 하고, 초연한 산처럼 무명으로 살아가야만 하며, 무색의 초심을 되새겨 거울의 바탕을 간직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그 모든 정착 조건들의 대미大尾를 장식하는 필수불가결의 요소는 무엇인가? 정착의 조건들을 하나로 집약시키는 노혜봉 시세계의 최종적 인생 덕목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겸손이다. 우쭐대지 않고 겸손하게 생의 노정을 걸어간다는 것이야말로 정착의 조건들을 하나씩 이룩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자 그것들을 완성시키는 최후의 미덕이 될 것이다. 
화자는 시세계 속에서‘어두운 벽으로 캄캄하게 눈을’감고 아득한 천길 벼랑을 걸으려 한다. 캄캄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벼랑 아래 끝없는 어둠의 나락 그리고 비극적 절망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왜 화자는 굳이 스스로 눈을 감아 그렇게도 비극적인 어둠을‘우두커니 캄캄절벽 눈을 감고 기다리’는 것인가? 상상만 해도 모골이 송연한 캄캄절벽을‘캄캄해질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려 보’려는 화자의 의도는 무엇인가? 진정 화자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좌절과 난국을 일찌감치 불러들이려 하는가? 고된 인생길에 지쳐서 그대로 시련의 수렁에 주저앉으려는 것인가? 왜 화자는 어둠을 찾고 절벽을 찾는가?
그것은 바로‘캄캄절벽’이야말로, 인생길을 걷는 화자의 오만을 깨뜨려주고, 정직함과 겸손함을 갖게 해주는, 매서운 죽비와도 같기 때문이다. 캄캄한 어둠과 천길 벼랑은 사람의 정신을 번쩍 깨치게 만드는 것들이다.‘사방이 어두운 벽으로 캄캄’한 환경 속에서 사람은 자연스레 작아질 수밖에 없다. 작아진다는 것은 스스로를 졸렬하게 생각하여 굴신하고, 자격지심을 가지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겸손하게 낮추어 보는 일이다. 제가 제일 잘난 것처럼 우뚝 서서 교만하게 걸어가는 것이 아니다. 조심스레 캄캄절벽을 한 발짝씩 걸어갈 때 사람은‘등을 꼿꼿이 세우고 눈을 조금은 아래로 뜬 채 그 아래를 심중을 들여다보며’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혼신渾身을 다해 나아가’지 않으면, 그대로 추락하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정신과 감각을 초집중해 날카로운 신경을 유지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캄캄절벽 그 아래를 무릎 후들거리며 떨며 나를 낮추어보는 일’이며,‘바로 등 뒤는 생각하지’않는 것이며,‘섣불리 한 발짝 내디디리라 다짐도 하지’않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겸손의 미덕에서만 창출될 수 있는 소박하고도 정직한 삶의 자세이다. 벼랑을 우쭐대며 걷다가는 그대로 곤두박질치기 마련이다. 인생길을 걷다보면 이와 같은 암흑의 절벽을 만나곤 한다. 마치 그 자체의 거대한 절망처럼 느껴지는 아득한 절벽 위에서 사람은 결코 좌절하지 말고, 오로지 겸손한 정진精進으로 그 길을 건너야 한다. 그래야만 그 길을 무사히 건널 수 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충천한 기세로 난리를 치다가는 절벽 아래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혼자 남게 될 것이다. 진력盡力하되 자만하지 않고, 전진前進하되 후회하지 않는 겸허한 마음가짐과 정직한 걸음걸이. 화자가 말하는 정착의 조건은 바로 이런 것들이다. 매사에 겸손하고, 범사에 조심스러운 자세를 통해 인생길을 건넌다면 마침내 최종의 이상에 정착하여‘머릿속이 환해’지는 경지에 오를 수도 있다.
화자는 그 경지에서 소중한 자연의 존재인‘하늘하늘 거기 한 그루 진달래 환한 꽃송이’를 만난다. 그리고‘그 분홍잎’속에서‘눈짓하곤, 그 입술하곤’ 하는 그 평온한 관조 속에서 밝게 피어나는‘바로 수막새 떠오르는 달덩이’,‘옛 신라인의 미소’를 만난다. 깎아지른 벼랑 아래 푸석한 절벽 돌 더미 속에서 꿋꿋이 피어난 영롱한 꽃송이와, 둥근 기와의 아름다운 곡선 속에서 지그시 웃고 있는 그 충만한 신라인의 면목面目을 떠올려보자. 그것들 모두는 겉으로 봐서 결코 화려찬란하고 황금빛 광영으로 번쩍거리는, 고고한 위대성을 담보하는 것들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하나 같이 소박한 은은함을 내포하고 있는 존재들이다. 모두가 작고 여려 보이는 것들이지만, 그것들을 암흑의 벼랑길 속에서야 비로소 찾을 수 있었다는 의미는, 시세계 속의 화자와 시집을 펼쳐든 독자들에게 그 어떤 존재들보다도 크나큰 충만함으로 다가온다. 내적인 경탄을 불러일으키는 소중함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진달래 송이와 달덩이 미소. 그것은 자신이 바라는 정착을 위해, 오롯이 겸손하게 인생길을 걸어가는 사람에게 주어지는‘일상의 선물’로 볼 수 있다. 때론 답답하고 지치기 쉬운 인생길에서 접하게 되는 소소한 기쁨이란, 그 자체로 나의 피로를 씻어주는 소중한 활력소라 할 수 있다.
사람의 생애는 어쩌면, 한숨 쉬게 만드는 절벽과도 같다. 날선 돌멩이들과 우둘투둘한 바위틈을 비집고 오르내려야 하는 생의 등반에서 우리는 때때로 좌절하여 눈물을 훔치게 된다. 그러나 나 자신의 마음을 겸손하게 가다듬고 최선의 노력을 기하는 순간순간마다, 소중한 꽃송이들과 은은한 달덩이 미소는, 뿌연 흙먼지 속에서 그리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 나의 기상氣像을 응원한다. 그것들은 환한 봄빛으로 나에게 위안의 존재가 된다. 암흑을 걷어내고 한 줄기 전망의 빛으로, 이상적인 봄빛으로 그것들이 다가올 때, 나는 비로소 정착의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된다. 의연하게, 초연하게, 처음처럼, 겸손하게 정착의 조건을 수행하며 생의 노정을 차근히 걸어간다면, 머지않아 저 봄빛처럼 나의 꿈에 도달할 수 있다는 긍지와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노혜봉 시학詩學의 의의는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신승민(한양대학교 한국언어문학과3)  pressyu@y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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