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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병과 출신 최초의 여성 장군
  • 주은성 기자, 백홍 준기자
  • 승인 2015.10.12 17:40
  • 호수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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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대장 재직 당시 미여군 부대 방문 모습

 송명순 동문(정치외교학과 76학번)은 우리 대학교 졸업 후 군 생활을 시작했다. 특히 2010년에는 전투병과 출신의 최초 여성 장군으로 이름을 알렸다. 현재 전역 후 대구가톨릭대학교에서 교수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그녀를 만나 현재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고, 모교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들어봤다.

전투병과 출신 최초의 여성 장군

어린 시절의 이야기부터 듣고 싶다. 대학생 때의 송명순은 어떤 사람이었나?
 세월이 흘러 그 당시 같이 공부했던 친구들에게 “특이한 직업으로 갔는데 그 직업에 적합한 성격이었다”라는 평을 듣는다. 특별히 활발하거나 활동적인 성격은 아니었지만 남들과 잘 어울리고 친화력 있고 어떤 조직에 들어갔을 때 두려움이 없었던 것 같다.

 정치외교학과에서 여군의 길로 접어들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당시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면 정당이나 신문기자가 되는 경우가 많았고,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처음부터 여군이 되겠다고 꿈꿨던 것은 아니다. 당시 여자가 대학을 나온다는 것은 시집을 잘 가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군인이라는 직업은 남성들과 동등한 조건에서 경쟁할 수 있는 직업으로 보였다. 또 오히려 여성들 간의 경쟁보다 남성들과의 경쟁에서 인정받는 것이 쉬울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의 만류는 없었나?
 심했다. 아버지도 직업군인이셨는데 근무 환경이 열악하다 보니 자녀들의 교육에 소홀해지고, 이래선 안 되겠다고 생각하신 아버지께서는 대위를 끝으로 전역하셨다. 이런 상황에서 아들도 아닌 딸이 군대에 가겠다고 하니 당연히 반대했다. 어머니는 쓰러지셔서 병원에 입원하실 정도로 힘들어하셨다. 정교사 자격증이 있었기 때문에 여성의 직업으로 아주 인기가 많았던 교사로 갈 수 있는 여건이 됐음에도 인지도도 낮고 위험한 군인이라는 직업으로 가려해 충격이 크셨던 것이다.

 가족과 친구들의 반대가 심했음에도 불구하고 군인이라는 직업에 한번 부딪혀 보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당시에는 3년만 경험해보고 전역할 생각으로 입대했으나 이 자리까지 오게 됐다.

 “제일 먼저 전역할 것 같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체구도 작고 약했다. 그런데도 힘든 군 생활을 버텨 낸 원동력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당시 몸무게가 43kg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키가 작고 비위도 약해 음식도 잘 못 먹었다. 병원에 실려 간 적도 있다. 그때마다 동기들이 “너는 전역기간인 3년만 채우면 가장 먼저 전역할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 친구들은 다 전역하고 나만 남았다. 그 이유는 앞으로의 군 생활에 대한 기대가 생겼고 남자들의 집단 사이에서 나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했을 때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좋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힘들어도 이 직업에 가치가 있음을 느꼈다.

 군인을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은 없었나?
 많았다. 첫째로 지금은 군인이 자녀를 두면 자녀를 양육할 수 있는 시설이나 보호 제도가 많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이러한 제도가 부실했다. 그래서 자녀를 양육하는 문제 때문에 전역을 고민한 적이 있다. 두 번째는 군 생활 10년째에 접어들 때쯤 일종의 권태기가 왔었다. 3년 정도 경험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들어왔던 군에 10년을 머물렀으니 다른 생활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대령으로 진급할 때 쯤 부모님께서 질병으로 인해 굉장히 힘든 시기를 견디고 있어 전역을 고민했었다.

 원할 때 전역하는 것은 힘들다. 그래서 이러한 큰 고비에 마주했을 때 전역을 하지 못했다. 첫 번째 고비 때는 내 선배들이 전역을 만류하고 조건을 완화하고 환경을 바꿔 전역하지 않도록 도움을 주셨다. 두 번째에는 입대를 그렇게나 만류하시던 어머니께서 ‘도움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도와줄 테니 이왕 시작한 군 생활이면 끝을 봐라’고 하셨다. 이렇게 두 번째 고비를 넘겼다. 세 번째 고비도 역시 지휘관의 도움이 컸다. 당시 상황이 여군 붐이 일어 여군의 숫자가 증가했을 시절이었다. 그때의 지휘관은 “후배들이 기지개를 켜려는 순간에 선배가 돼서 부모님이 편찮으시다는 단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 책임감 없이 전역하는 것이냐”고 많이 꾸짖으셨다. “필요한 만큼 휴가를 주고 원하는 시간에 근무지에서 이탈해 병원에 가 있어도 이해해 줄 테니 그만두지 마라”고 하셨다. 지금까지도 이 분은 내 군 생활의 멘토다.

 군인을 하며 가장 보람찼던 순간은 언제였는가?
 여군이라는 집단 자체가 소수였기 때문에 후배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준 것이 가장 보람 있었다. 우리 선배들이 우리에게 “우리가 너희를 위해 이 길을 닦아 왔으니 너희도 너희의 후배들을 생각해 어떤 일도 감수해야 한다”고 하셨다. 닐 암스트롱이 달에 착륙하며 ‘한 사람의 인간에게는 보잘것없는 한 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라고 한 것처럼 내가 힘들게 딛는 한 걸음이 후배들에게는 편한 첫 걸음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보람 있었던 것 같다.

 군 생활을 하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소령 때 처음으로 군 교육기관에 교육을 받으러 갔다. 당시 남자들은 실무 경험이 많이 있고 교육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군 생활이나 지식에 대해 훤하게 알고 있다. 하지만 여군은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으니 모든 것이 생소했다. 그 교육 기간 동안 시험도 엄청나게 많이 봤다. 한 교육이 끝나면 테스트를 하고, 한 달마다 시험을 보고 그랬다. 하지만 모든 내용을 소화해 시험을 볼 여건이 안됐기 때문에 무작정 밤을 새우면서 책을 암기했다. 책에 있는 오타까지도 그대로 암기할 정도여서, 교관들이 ‘책에 있는 오타를 그대로 베껴 썼지만 노력이 가상하다’고 평가받았다. 30년간 군 생활을 하면서 돌아다니다 보면 당시 교관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때마다 항상 듣는 얘기가 ‘오타까지 그대로 외운 애’였다. 이때의 기억이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다.

 본인이 전투병과 출신으로서 최초의 여성 장군이 됐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
 처음 한 30분 정도는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정말 딱 30분이었다. 그 후로는 앞으로 어떻게 헤쳐가야 하나라는 생각에 부담과 걱정이 컸다. ‘조직을 끌고 나가기 위해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하나, 우리 조직이 살아남을 방법은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컸고 책임감 때문에 굉장히 마음이 무거웠다.

 현재 군 내에서 여군의 위치는 어떤가?
 ‘1만 명 시대’가 함축적으로 말해주는 것 같다. 필요하지 않으면 확대할 이유가 없다. 우리나라의 안보 상황은 북한과 대적하고 있으므로 싸워서 이기는 군대가 맞지만, 전 세계적인 군의 역할은 사회적인 역할이 크다. 예를 들어 홍수나 폭설이 있을 때 군인들이 투입되는 것이다. 결국 민간인들과의 접촉, 약자 보호, 평화유지 등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여성들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 대한민국의 여군은 군의 자산이라고 표현하고 싶을 정도다.

 90년대쯤에 2020년도가 되면 여군의 숫자가 7,000명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2015년인 지금 벌써 여군 1만 명의 시대다. 그렇다면 군에서 여군의 역할이나 기여 측면에서 인정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은 어떤 군인이었다고 생각하는가?
 군인 본분을 다하고 한눈팔지 않았던 것 같다. 여군이라는 조직이 작지만 그 조직이 군 내에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 군인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좋은 평가를 받을 수는 없고 부족했지만, 스스로 좋은 평가를 주고 싶다.

 후임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나?
 나도 좋아하는 선배가 있고 그 선배를 닮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데, 내 후배들도 나를 ‘닮고 싶은 선배’로 생각하면 성공한 군인이 아닐까. 내가 가진 단점도 많겠지만, 그런 단점도 장점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후배에게서 닮고 싶다는 평을 듣고 싶다.

 군인이자 엄마로 생활하며 힘들진 않았는가?
 당시 군 생활을 하면서 자녀 양육을 할 수 있는 제도가 제대로 있지 않아 자녀들을 거의 방목했다. 이사만 해도 24번 정도 했다. 정서적으로 많이 불안했을 것이다. 지금도 2년 정도 지나면 이사 안 해도 되느냐고 물을 정도다. 아이가 아파도 병원에 제때 못 데려가서 병이 깊어지기도 하고 학교생활에 적응을 잘 못 했던 적도 있었다.

 현재 여군이 꿈인 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여군은 남들이 보기에 멋있다. 하지만 그곳에 함정이 있다고 생각한다. 겉으로 보이는 멋스러움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이 힘들다. 이런 것을 소화해낼 힘이 충분히 있으면 얼마든지 도전했으면 좋겠다.

 또한 경제적인 부분을 생각하고 군인을 꿈꾼다면 감수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경제적 보상에 묶여 직업을 선택하면 스스로가 힘들고 슬프다. 군인이란 국가를 생각해야 하고 국가에 대한 감사함을 가진다면 힘들지 않을 것이다.

 모교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지향점을 성공하는(best) 삶보다 좋은(right) 삶에 초점을 맞췄으면 좋겠다. 좋은 삶은 성공적인 삶이 될 수 있지만, 성공하는 삶은 좋은 삶이 될 수 없다. 많은 사람은 성공을 쫓지만 후배들에게는 좋은 삶을 쫓으라고 얘기해주고 싶다.

 송명순 동문에게 애국심은 어떤 의미인가?
 군인들은 기본적으로 맹목적인 애국심을 가지고 있다.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의 결정에 의해 행동하는 조직이지 ‘맞다’, ‘아니다’를 결정하는 조직이 아니다. 그래서 맹목적일 수밖에 없고 맹목적이어야 했다. 하지만 사회인이 되고 보니 맹목적인 애국심이 아닌 현실적이고 감각이 있는 가치관으로 애국심을 발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송명순 동문에게 영남대학교란?
 언제나 찾아와도 환영해주는 곳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자식이 아무리 밖에서 잘못하고 들어와도 이유를 묻지 않고 품어주고 잘못한 것에 대해 호되게 질책하는 ‘엄마 품’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군 생활 중에서도 힘과 도움을 많이 얻었다. 늘 고마운 엄마 같은 존재라고 표현하고 싶다.

인터뷰를 마친 기자들의 이야기

 한때 군인이라는 직업을 꿈꿨던 사람으로서 송명순 동문을 만나기 전 설레는 마음이 가득했다. 동시에 전투병과 출신의 최초 여성 장군이라는 수식어 탓에 냉철하고 차가운 이미지가 연상돼 긴장도 했다. 하지만 첫 만남부터 환한 미소를 보이시며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주신 덕분에 어려움 없이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었다.

 송명순 동문은 부드러움 속 강인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학창시절이나 가족 등 개인적인 얘기를 할 때면 마치 엄마처럼 부드러웠다. 반면 군 시절 얘기를 할 때는 카리스마와 군에 대한 사랑이 느껴졌고 대한민국의 여군이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모교의 선배로서, 또 인생의 선배로서 기자들에게 해주시는 이야기 하나하나에 반성하고 깨달음을 느꼈다. 인터뷰를 마치며 “영남대학교의 수많은 동문 중 나를 만나줘서 고맙다”고 말씀하시던 송명순 동문에게 오히려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주은성 기자, 백홍 준기자  jes0025@ynu.ac.kr, bh0827@y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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