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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의 조건과 장인정신 - 명작 속에 깃든 장인적 수련과 연찬
  • 현승엽 기자
  • 승인 2015.11.16 21:23
  • 호수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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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작이 되기까지=명작 중에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작품 중 하나는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다. 다빈치가 그린 그림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이 그림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가 ‘너희 중에 한명이 나를 배반할 것’이라는 폭탄선언을 하는 순간을 그린 것이다. 이 그림 속에는 특히 세 가지가 눈에 띈다. 유다는 왼쪽 끝에 있는데, 예전부터 나쁜 사람은 시커멓게 묘사해 잘 보이지 않는다. 또 예수는 중요한 인물로 다른 이들보다 더 크게 그렸다. 그리고 제일 나이가 어린 요한은 예수의 품에서 자고 있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이렇게 이야기로 돼 있던 것을 다빈치는 마치 그 순간을 포착한 것처럼 그림으로 그려냈다. 또한 그림을 살펴보면 예수 제자 중 오른쪽 세사람은 예수의 이야기를 잘 못 들었는지 웅성웅성하고 있고, 왼쪽에는 성격 급한 베드로가 옆에 있는 유다를 밀치고 예수에게 달려가는 장면이 있다. 이 그림은 연극이나 뮤지컬에서 스톱 모션 기법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림이라는 것은 3차원의 물체를 2차원 평면으로 옮기는 작업이기 때문에 원근이나 입체를 표현하기 힘든데, 다빈치는 여러 기법을 사용해 이를 표현했다. 이러한 재능을 가진 다빈치가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시대적 시스템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시대에는 길드라는 동업자 조직에서 함께 일을 하고 고대 수업을 받고, 십년이 지나면 동업자들은 다른 지역에 가서 다른 선생의 수업을 찾아 듣는 시스템이 주를 이뤘다.

 역사적으로 ‘인간적이다’라고 하는 것은 크게 두 번 그 의미가 바뀌었다. 르네상스 전에 ‘인간적이다’라고 하는 것은 신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한계 상황을 용인하는 것을 뜻한다. 한편 근세사회로 넘어가 ‘인간적이다’라는 뜻은 야수가 아니며 아직까지 신에게 의지하고 있는 인간의 특성 등을 얘기한다.

   
▲ 뒤러의 자화상

 ‘뒤러’는 자화상을 많이 그린 화가로 유명하다. 뒤러가 22살 때 뒤러의 아버지는 그를 장가보내려고 여자를 만나라고 했지만, 뒤러는 자기가 직접 가지 않고 여자한테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 보낸다. 그 그림은 뒤러의 매혹적인 눈과 당당한 모습이 특징이다. 대부분 자화상들은 눈이 앞으로 향하고 있다. 이유는 거울을 보면서 그리기 때문이다. 어떤 그림에는 시선이 옆을 보고 있는데, 이는 자기 얼굴을 형상적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뒤러는 13살 때부터 자화상을 그리는 솜씨가 뛰어났다고 할 수 있다.

 글씨를 쓰는 솜씨가 뛰어난 사람으로는 한석봉이 있다. 불을 끄고도 글씨를 잘 쓴다는 옛 설화처럼 그는 천자문, 행주대첩비 등을 활자로 채집한 것처럼 정확하게 써냈다. 한편 또 다른 명작으로는 ‘추사’라고 하는 사람의 글씨가 꼽힌다. 추사의 글씨는 어떤 부분은 굵게 뭉뚱그려놓고 어떤 부분은 얇은 글씨체로 쓰여졌다. 들쭉날쭉하게 쓴 것이 이 글씨의 특징인데, 추사체의 본질은 ‘개성으로서의 괴’이다. 추사의 글씨는 보통 우리가 따라 써보면 지저분할 뿐이다. 그런데 글씨의 묘를 참으로 깨달은 서예가라면 글씨의 법도를 무시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법이다. 추사에게는 법도를 떠나지 않는 힘이 글 속에 있고, 예서체를 기본으로 장중한 필체이면서 동세가 강하고 하늘에서 놀고 바다에서 노는 듯한 기상이 돋보인다.

  명작이 나오려면 사회적, 문화적 전성기에 최고의 재력, 최고의 기술 등이 뒷받침돼야한다. 또한 명작이 인정받기 위해서는 3백년이 지나봐야 한다. 고대 국가로 넘어갈 무렵이 돼야 명작은 빛을 발한다. 우리 영남대학교 박물관은 임당동 고분에서 원삼국 토기를 처음으로 발굴했고 국립중앙박물관에서도 대여해 간 적이 있다. 그만큼 가치가 큰 토기였으며, 그 정도의 가치를 만든 것은 지난 300년의 시간이다.

 일본 문화, 인정할 건 인정해야=장인정신을 구현한 나라로는 일본이 어느 나라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국내편 시리즈를 다쓰고 일본편을 쓰려고 했는데 한일관계를 보며 예정보다 일찍 쓰게 됐다. 우리가 일본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으려면 일본을 알아야 하는데, 일본에 대해서는 배운 적도 없고 알려고 해도 가이드라인이 없는 상태다. 이러한 상황이 우리가 그들과 상대할 때 질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다. 일본사람이 쓴 한국미술사는 있지만, 한국사람이 쓴 일본미술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우리는 공자, 이태백, 양귀비 등 중국의 역사적 인물에 대해서는 많이 아는데, 일본에 대해 아는 사람은 잘 없다. 기껏해야 도요토미 히데요시, 아베, 이토 히로부미 세 사람 정도일 것이다. 이 정도만 알고서 일본을 어떻게 배척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넘어간 도래인들이 만든 문화는 일본의 문화로 봐야 한다. 일본 고대문화를 보고 우리 조상이 일본에 남긴 문화라며 인정을 하지 않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일본은 고대사 콤플렉스가 있어 역사를 왜곡하려 하고, 한국은 근대사 콤플렉스로 일본 문화를 무시하려 한다.

 일본은 장인정신 문화의 기틀을 만들어 놓았다. 그 영향으로 일본은 직업에 귀천이 없다. 예를 들어 호텔방을 치우는 사람은 방을 청소하는 것이 자기의 일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팁을 받을 이유가 없다. 또한 택시 운전수가 친절한 것은 돈을 받고 차로 손님을 모시는 것이 자신의 임무고, 직업이기 때문이다. 한번은 제가 일본에서 뱀 무덤을 찾을 때 어떤 사람이 끝까지 충실하게 안내해 줬다. 아마 그 사람은 집에 가서 그날 자기가 도와준 일을 뿌듯해하면서 가족들과 이야기를 할 것이다.

 이러한 장인정신이 일본에서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것이 ‘시니세’ 문화다. ‘시니세’는 오래된 점포를 뜻하는 말인데, 일본 교토에 가면 오래된 점포들이 모여있는 전통거리가 있다. 양념가게 등 전통거리의 가게들은 오랜 시간 동안 대를 이어 건물을 바꾸지도 않고 꾸준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서울의 경우 ‘평양면옥’ 같은 가게는 3대째 내려온다고 간판에 써 놓고 자랑하는데, 일본 가게들은 그런 것을 써 놓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본에는 워낙 오래된 가게가 많기 때문이다. 일본의 한 찹쌀떡 가게는 임진왜란 때 만든 것이라 400년이나 됐지만, 오래된 전통을 알리려 하지 않는다. 그 찹쌀떡 가게 앞에 있는 가게가 800년 정도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경우 대를 이어 가게를 운영할 때 그 가게를 더 크게 발전시키기 위해 돈만 벌면 가게를 확장하고자 새로 건물들을 짓는다. 그러나 일본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또한 일본에서 자식이 장관이나 미쓰비시 상무같은 아무리 높은 직위에서 일을 할지라도 자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아버지가 해오시던 가게의 대를 이어받기 위해 하던 일을 포기하고 철물점 등을 운영하는 사례가 수 없이 많다. 그것을 당연히 자신이 해야 할 의무이자 사회적인 도리라고 생각한다.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들은 한반도 정세 변화가 일어날 때마다 규슈로, 오사카로 넘어갔다. 일본에서도 기꺼이 이들을 받아 준 이유는 이들이 기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토기 만드는 집단, 말 안장 만드는 집단 또는 왕인박사 후예 등 그들이 전문화할 수 있는 분야에 소속돼 장인이 될 수 있도록 지도를 받고 기술을 전수하기도 했다. 그래서 12세기, 13세기에 불상을 만들 때도 교토 원파 등 40~50명의 장인 집단들이 모여서 기둥과 기둥 사이가 33칸으로 양끝이 100m가 넘고 그 안에는 관세음보살상이 모셔져 있는 불상을 만들었다. 이런 문화와 기술을 갖고 있는 일본을 어찌 우리가 무시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들의 문화를 사실 그대로 받아드릴 줄 알아야 한다.

 또한 일본 최초로 장군 벼슬을 받은 사람은 백제계 6대손이다. 백제계 도래인이 장군이 돼서 반란을 진압하고 최초의 정이 대장군이 된 것이다. 그는 6대째 내려온 백제계 사람이지만 일본사람으로 봐야한다. 그 사람은 일본사람이었기 때문에 장군이 될 수 있었다. 그들이 가진 것을 인정해 줄 것은 인정해 주고 잘못된 것은 맞서야 한다. 일본은 장인들을 대접하고 존중하는 등의 배경이 있었기에 이러한 장인정신이 깊숙이 자리잡을 수 있었다.

현승엽 기자  hsy0131@y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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