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 2017.10.11 수 11:25
상단여백
HOME 사회
상처받은 자에게 쑥부쟁이 꽃잎을
  • 장수희 기자, 지민선 기자
  • 승인 2016.05.24 14:11
  • 호수 1625
  • 댓글 0
   
 
   
 

자유를 갈망했던 그 해의 봄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되면서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됐던 군사 정권 시대가 일단락됐다. 그 후 국민들은 진정한 민주화가 실현될 것임을 기대했으나,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12·12 사태를 일으켰다. 때문에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점점 더 커졌고, 1980년 5월로 들어서면서 전두환 전 대통령의 퇴진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전국적으로 늘어났다. 이에 군부에서는 5월 17일 자정을 기해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으며, 계엄령이 선포된 다음 날부터 열흘간 광주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누가 그날을 잊었다 말하리=전남대학교 학생들은 계엄령이 선포되면 학교 앞에서 만날 것을 약속했다. 이에 이들은 5월 18일 휴교령이 내려진 후 학교 교문 앞으로 모였고, 이를 저지하던 계엄군과 싸우게 된다. 당시 많은 학생들이 다쳤고, 광주역에 다시 모인 학생들은 계엄군에 대항해 시위했다. 잔혹한 시위진압에 부상당한 학생들의 모습에 분노한 시민들은 시위에 합세했고, 19일부터 시위대와 계엄군의 대치상황이 본격화됐다. 이에 5월 19일 광주 길거리에서 시민들은 이렇게 외쳤다. “나는 공산당도 아닙니다. 난동자도 아닙니다. 단지 선량한 광주시민의 한 사람일 뿐입니다. 아무 죄 없이 우리 학생, 시민들이 죽어가는 것을 더 이상 바라보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 나섭시다. 학생들을 살립시다. 계엄군을 물리치고 우리 스스로 광주를 지킵시다.”

 광주 시민들이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20일부터 시위는 무장항쟁으로 변해 약 20만 명의 시민이 계엄군의 저지선을 뚫고 시청건물을 장악했다. 이에 계엄군은 광주를 고립시켰고, 시외전화 통신망은 단절됐다. 시민을 향한 계엄군의 발포는 수많은 사상자를 냈고,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21일 경찰서나 계엄군에게서 탈취한 소총으로 무장해 시위를 계속 이어갔다. 이날 시민군은 도청을 장악했고, 계엄군은 시 외곽으로 철수했다. 광주 시민들과 대학생들은 녹두서점을 기점으로 자유롭게 만나고 정보를 공유하며 ‘이런 상황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했다. 시민들은 이곳에 모여 투사일보를 제작하고, 시민궐기대회를 조직했으며 시외 전화가 두절되고 난 뒤에는 인편으로 시외를 벗어나길 시도했다.

 그러나 27일 새벽 0시, 계엄군은 도로를 봉쇄하고 완전 무장한 채로 도청을 에워싸며 시민군 진압작전을 시작했다. 시민들은 계엄군에 끝까지 저항했지만, 대부분은 도청 근처에서 산화했다. 시민군 윤상원은 어린 학생과 여성들을 내보내며 살아남아서 역사의 산 증인이 되라 말했다. “고등학생은 먼저 총을 버리고 투항해라. 우리야 사살되거나 다행히 살아남아도 잡혀 죽겠지만 여기 있는 고등학생들은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민주주의와 민족 통일의 빛나는 미래를 위해, 항쟁의 마지막을 자폭으로 끝내서는 안 된다. 자, 고등학생들은 먼저 나가라”

 그 후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주요 언론사에서는 5.18과 관련해 왜곡 보도를 쏟아냈으며,  시위대 진압 후에도 진실이 아닌 정부의 발표를 그대로 실어 내보냈다. 민주화를 향한 학생과 광주 시민들이 열흘간 펼친 항쟁은 계엄군에 의해 짓밟혔고, 아직 시신을 찾지 못한 사망자까지 수많은 피해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나는 아직 1980년 5월을 기억한다=민주화 운동에 직접 참여했고, 현재 5.18에 대해 왜곡된 사실을 바로잡으려 애쓰고 있는 차명숙 씨는 1980년 5월 당시 20살로, 광주 길거리에서 가두방송을 통해 시민들에게 당시 상황 소식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그 당시 방송이나 신문 등 모든 언론이 통제돼 사람들이 아무 소식도 듣지 못하게 된 시급한 상황 속에서 차 씨는 ‘군인이 왜 들어왔을까’라는 의문을 가졌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소식을 알려야겠다’, ‘이렇게 광주를 지켜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래서 가두방송에 필요한 기계를 구입했고, 길에서 시민을 향해 방송을 하기 시작했다.

 군에서는 차 씨가 고정간첩이며, 더 많은 간첩이 있었기에 그들의 도움으로 방송을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후에 차 씨는 살아계신 분들의 증언을 듣고 ‘방송을 한 사람들은 머리를 겨냥해 골이 터지는 것을 확인하라(사살하라)’는 계엄군의 지시가 내려졌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 차 씨는 군에 잡혀 간첩으로 몰리며,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고문을 받았다. 흰 속옷에 잉크를 쏟은 것처럼 검붉게 변할 정도였다.

 이뿐만 아니라 교도소에 들어가서 30일 동안 독방에서 지내며 받은 징벌 또한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고통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고문을 겪고 교도소를 나왔지만 차 씨는 여전히 광주가 좋았고, 그리웠다. 그래서 경찰에게 간곡히 말했다. ‘광주에서 살고 싶어요’라고. 차 씨가 나타나면 어디든지 경찰이 따라붙었고, 수많은 사람들의 불신과 의심이 가득한 눈빛을 받아야만 했다. 그래서 ‘아, 광주를 잊어버려야겠다. 다신 오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고 광주를 떠났다. 그러나 16년 후 역사가 왜곡됐고, 차 씨 본인 역시 왜곡되고 있었다. 이에 차 씨는 ‘내가 살아있노라고, 안죽었다고, 나를 더 이상 왜곡하지 말라’라고 말하기 위해 8년째 광주로 돌아오고 있다고 말했다.

5.18 ‘민주화 운동’입니다

 5.18 민주화 운동. 이는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다. 분명 우리가 배워온 역사 교과서에서는 5.18을 5.18 민주화 운동이라 가르쳤고, 이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학생들이 대다수일 것이다.

 하지만 과거 우리 국민들은 1980년 5월 18일의 일을 수십 년 동안 ‘광주 사태’라 불렀고, ‘국가 권력을 강탈한 이들의 진압작전이 사회 안정을 위한 폭도의 진압 작전’이라 생각했다. 참혹한 주검을 붙들고 진실만이라도 밝혀 달라고 몸부림치는 고립무원의 광주를 ‘빨갱이의 도시’라 불렀다. 또한 광주시민을 학살한 이들에게는 광주 진압 작전 공훈과 제5공화국 출범에 이바지한 공로 등으로 훈장과 표창을 수여했다. 그러나 5.18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고 16년이 지난 1996년 12월, 이른바 12·12 사태와 5·17 쿠데타 등으로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이 재판장에 서서 5.18과 관련한 범죄 사실을 입증했고, 2006년 3월 21일이 돼서야 국무회의에서 이들이 받은 훈장은 모두 박탈됐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폭동’임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중 최근 가장 이슈가 되는 사람은 지만원 씨(전 육군)이다. 지만원 씨가 운영하는 ‘지만원의 시스템클럽’에 지속적으로 5.18 민주화 운동을 “북한정권에 의해 남파된 600명 정도의 북한특수군이 국가전복을 목표로 광주시민을 선동해 일으킨 게릴라 폭동”으로 여기며, “5.18 사건은 역적사건이라는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났으며 숨길래야 숨길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이라고 주장해오는 글을 써왔다. 지난 19일 지만원 씨는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재판이 끝나고 나오며 광주시민과 피해자들의 격렬한 항의로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또한 구국통일네트워크, 국가개혁구수회의, 나라사랑어머니연합 외 13개의 집단은 광주 5.18 진상규명국민모임을 조직해 지난 10일에 성명서를 제출했다. 전반적인 내용은 광주 5.18은 북한군이 남한 내의 불순세력과 합세해 일으킨 폭동이라는 것이고, ‘북한군의 광주시민 살상운동을 매년 성대하게 기념하고, 거기에 머리를 조아려 참배하고, 거액의 혈세를 반역활동에 쏟아 붓고 있는 것’이라는 내용을 포함한다.

 또한 포털사이트에 ‘5.18’을 검색하면 ‘민주화 운동’도 떠오르지만 ‘폭동’이 떠오르기도 한다. 폭동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은 5.18 폭동의 근거로 ‘북한군 개입설’, ‘탈북자 증언’ 등을 내세우곤 한다. 또한 “형태로 봤을 때 폭동이 분명하다. 무기고 습격, 경찰서·언론사 습격, 도청점거. 이것이 폭동이 아니면 무엇인가”라는 말을 하곤 한다. 하지만 광주 시민들의 행동에는 타당한 이유가 존재한다.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독재가 끝나자 억압받던 국민들은 민주화를 기대했다. 하지만 12.12 사태로 인해 전두환 전 보안사령관이 실질적 권력을 장악했다.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은 곧바로 계엄령을 선포해 모든 정치활동 중지 및 집회 시위의 금지,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의 사전 검열, 각 대학의 휴교령 등의 조치를 취해 국민들의 자유를 억압했다. 이에 5월 18일, 민주화를 꿈꾸는 광주 시민들은 비폭력시위를 진행했다. 이에 계엄군은 21일 시민들에게 총을 쏘고, 무차별적인 구타를 시작했다. 비무장상태였던 광주 시민들은 무차별적으로 죽임을 당했다. 이에 시민들은 무기고를 열고 무기를 사용해 무장을 시도했다.

 5월 20일, 사실보도를 하지 않고 계엄군에 유리한 방송을 하는 방송국에 분노를 느낀 광주 시민들은 방화를 해 방송국을 불태웠다. 또한 계엄군의 폭력 진압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자 광주 민주화 운동을 시작했다. 광주시민들은 도청을 점거해 ‘휴교령 철회’, ‘계엄령 해제’ 등을 외쳤다.

 5.18 민주화 운동 36주년을 맞는 올해, 8개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가운데 2개만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해 자세히 다뤘다. 나머지 6개의 교과서는 간단한 소개 정도하는 수준에 그쳤다. 그중 한 교과서는 5.18 민주화 운동을 왜곡했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12.12 사태: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노태우 등이 이끌던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세력이 일으킨 군사반란사건.
 *5.17 쿠데타: 1980년 5월 17일 전두환·노태우 등이 신군부 인사가 정권 장악을 위해 주도한 비상계엄 확대조치에 의해 발생한 사건.

1980년 5월의 대학생

 그 당시 전남대학교는 5.18 민주화 운동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던 그해 5월에는 전국의 대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시위에 참여해 전두환 전 대통령을 비롯한 군부 정권의 퇴진과 민주화를 외쳤다. 그 당시 전남대학교와 우리 대학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전남대학교는 1980년 5월 18일 전남대학교 학생 200명이 교문 앞에서 계엄군과 대치를 벌였으며 많은 광주 시민들이 시위에 참여하도록 했다. 이후에도 광주역이나 금남로 일대에 모여 민주화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 때문인지 그때 당시 계엄군이 전남대학교 학보사가 발행한 자료들을 모두 태워버려 남아있는 자료가 없다.

 1980년 5월 당시 영대신문에서 발행된 신문을 찾아보면 5월 14일자 신문이 9월 10일자 신문이 나오기 전 마지막 신문이었다. 이 시기에 쓰여진 기사는 모두 민주화 운동에 관련한 것이었다. 당시 우리 대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정인수 씨(법학부 80학번) “당시 전국적으로 계엄령이 선포돼 우리 대학교도 휴교령이 내려졌었다”고 밝혔다.

 14일에 쓰여진 기사 중 ‘민주화 횃불은 지성의 외침’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드디어 천마는 분연히 일어섰다’라는 구절로 시작하며, 민주화를 열망하는 우리 대학교 내부의 상황에 대해 전해주고 있다. 해당 기사에 따르면 당시 우리 대학교 학생들은 1979년 10·26일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사건 이후 나라의 정세를 지켜봤다. 그러나 언론에 학교의 진상이 올바르게 보도되지 않았다. 이에 천마축제를 포기하겠다 선언하고 중간고사를 중단한 후 대대적인 궐기대회를 가졌다.

 1980년 5월 8일 도서관 서편 광장에서는 수천 명의 우리 대학교 학생들이 모여 철야농성을 벌였고, 일부 단과대에서는 민주화 횃불 대행진을 가졌다. 그러나 학교의 상황은 여전히 왜곡돼 보도됐고, 이는 학생들의 분노와 의혹을 불러 일으켰다. 이에 총학생회에서는 긴급 운영위원회를 소집하고 학생회를 중심으로 한 조직적인 의사표시를 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특별담화를 통해 본교의 문제해결을 위해 적극 나설 것을 밝힌바 있는 이인기 총장은 교수와 학생들에게 신임을 얻었고, 민주화를 갈망하는 학생들의 시위에 힘을 보탰다. 학생들은 민주화를 외치며 학교 내부 문제부터 해결하고자 했고,  결국 학생시위에 의해 3명의 재단이사가 사임했다. 그리고 이 사실의 일부가 외부로 알려지기도 했다. ‘재단이사의 사표를 받았지만 학생들의 시위는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을 것이며, 조국의 민주화를 향한 지성들의 애끓는 함성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로 기사가 마무리 된다.

 또한 당시 계엄령으로 인해 모든 언론이 사전 검열을 받았다. 영대신문도 예외는 아니었다. 계엄기간 동안 정부가 신문, 방송, 통신, 잡지를 모두 검열했으며 기성언론뿐만 아니라 대학 학보사도 검열을 받았다. 도청에 있던 군인들이 영대신문에서 작성된 기사를 검열하기도 했다.
   
 

그 날을 기억하는 밤

 지난 17일에 1980년대 당시 5.18 민주화 운동이 이뤄졌던 5.18 민주광장에서 36주년 5.18 민중항쟁 추모제, 민주대행진, 전야제가 진행됐다.

 5.18 민중항쟁 추모제와 민주대행진은 민주주의가 여전히 필요한 민중의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주체가 돼 진행됐으며 세월호 유족과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백남기 농민 가족 등이 참석했다. 이곳에서는 5.18 민주화 운동 당시 시민들이 나눠 먹었던 주먹밥을 나눠주는 등 다양한 행사를 진행했다. 또한 민주대행진에서는 오월풍물단, 5.18 민주화 운동 관련 단체, 유족, 국회의원 등이 5.18 민주화 운동이 열린 금남로를 향해 걸어갔다.

 5.18 희생자 유족들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함께 제창하고 추모시 낭송으로 전야제의 막을 열었다. 전야제에서 1980년 5월 27일 도청에서 마지막 방송을 했던 시민군이 당시의 상황을 증언하며 5.18 민주화 운동을 재현했다. 또한 오월 어머니들이 무대에 올라 직접 투쟁의 역사를 설명했다. 많은 사람들이 5.18 민주화 운동을 추모하며 함께 웃고, 울었다. 전야제에 참여한 한 시민은 “전야제를 통해 희생자들을 추모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 좋았다”고 말했다.

 제36주년 5.18 전야제의 주요 메시지는 ‘너희들은 오월을 지우려 하지만 광주는 기억하고 있다. 고통받는 이 누구든 오월 금남로로 오라, 광주가 함께 하리라’이다. 전야제를 총감독한 류의남 감독은 최근 5.18 민주화 운동의 가치가 인터넷 상에서 훼손되는 상황에 안타까워하며 광주를 비롯해 단체, 개인들의 노력이 더욱 필요함을 강조했다. 또한 “아픈 이들 누구라도 찾아와 함께 외치고, 울어줄 수 있는 오월 광주가 되기를 소망한다”고 전했다.

 같은 날 광주 북구에 위치한 5.18 민주묘지에서 유족회의 주관으로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추모제가 열렸다. 이날 추모제에서는 5.18 민주화 운동 당시 독일 유학생이었던 위상복 전남대학교 명예교수와 신상전 전 덕성여대 총장이 그 당시 상황을 생생히 전달하기도 했다.

 또한 5월 18일 당일에는 5.18 민주묘지에서 5.18 민주화 운동 기념식이 열렸다. 황교안 국무총리의 기념사로 시작된 이 행사에서 황 국무총리는 “특권과 반칙이 통하지 않는 공정하고 투명한 사회를 만들어 5.18 민주화 정신을 계승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장수희 기자, 지민선 기자  j20915@ynu.ac.kr, jms5932@ynu.ac.kr

<저작권자 © 영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장수희 기자, 지민선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