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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의 인문학] 삶의 공간과 시간
  • 곽미경 기자
  • 승인 2017.06.04 15:12
  • 호수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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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 천마아트센터 챔버홀에서 함성호 시인의 특강이 진행됐다.

  불확실과 불안의 사이, 필요한 것은 시간 건축=건축설계는 굉장히 잡다한 분야다. 건축가들이 제일 잘하는 것은 의뢰인을 꼬드기는 것이다. 사람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설득하고, 사람을 홀리게 만드는 기술이 있다. 이러한 기술은 말로만 해선 절대 안 된다. 그 말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여러 데이터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디자인’이다. 건축에서 디자인은 단순히 집을 예쁘게 그리는 게 아니다. 건축과 출신들은 디자인의 당위성을 따지며 디자인을 내놓는다. 그래서 설득력이 있다. 건축은 잡다한 학문인만큼 많이 써먹을 수 있지만 건축과 출신들은 건축가가 되려고만 한다. 대학교는 직업 훈련소가 아니다. 대학에서 배운 전공들이 여러분의 직업이 될 이유가 없다. 사회에 나가면 여러분은 전혀 다른 길을 걸을 수 있다. 건축과를 나와 건축가가 돼 건설회사 들어가야 하는 것은 오히려 미래의 폭을 줄이는 것이다. 철학이든, 사회학이든, 건축학이든 대학에선 재밌게 공부하면 되는 것이다. 사회에 나가 무슨 일을 하게 될지는 또 모른다. 여러분들은 불안한 게 아니라 불확실해야 한다. ‘내가 건축을 공부했는데, 건축가로 성공할 수 있을까?’ 이건 불안이다. 어린 친구들과 이야기하면 정말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는데, 어린 나이에 이미 자기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고 있는 것이다. 장래희망을 구체적으로 말하는 아이를 보며, ‘그게 과연 저 아이의 욕망일까?’ 하는 의심도 든다. 요즘은 자신의 미래를 너무 빨리 결정짓는다. 더 방황하고, 더 불확실해도 된다. 여러분은 미래가 불안하기에 자기의 진로를 성급하게 결정한다. 하지만 미래는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 더 시간을 두고 고민하면 된다. 인생의 진로를 정할 수 있는 시간은 충분하다. 이는 시간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와 다르지 않다.

 공간과 장소의 차이=건축은 어떻게 시간과 공간에 접근하는가? 요즘에는 한자를 배우지 않지만, 천자문을 보면 천지현황이 있다.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는 뜻이다. 이것은 ‘천현지황’ 이렇게 표기하는 것이 문법적으로 맞다. 그런데 한문은 말을 뒤바꿔놓으면서 시간과 공간을 얽혀놓는 데에 굉장한 재주가 있다. 우주(宇宙)는 집우(宇), 집주(宙)로 구성돼있다. 집주(宙)엔 말미암을 유(由)자가 있다. 이것은 시간을 가리킨다. 건물을 보면 기둥이 있고 사이에 열어놓을 수 있는 유리를 설치하는데, 기둥이 시간, 유리가 공간에 해당한다. 공간이 시간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동아시아 건축의 특징이다. 그런데 여러분은 건축물을 보고 이런 특징을 잘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서양식 교육을 받고 서양식 사고를 해 동양의 전통을 물려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의 우주론, 건축론은 우리들에게 전달되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공간과 장소는 어떻게 다른가? 여러분은 우주 장소라고 하지 않고, 우주 공간이라고 한다. 공간이 점점 현대화되면서 사람들은 공간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카페의 어느 공간이 좋다고 표현하지, 장소라는 표현은 잘 쓰지 않는다. 공간과 장소는 분명히 다르다. 여러분은 공간과 장소의 차이를 모르면서도 일반적인 대화를 할 땐 공간과 장소를 아주 정확하게 구분해서 쓴다. 촘스키가 말한 생성문법은 사람들의 뇌에는 모든 언어를 할 수 있는 문법적 구조가 이미 내장돼 있다는 것이다. 공간은 순수한 물리적 공간이다. 그런데 장소는 공간에 시간이 개입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느티나무 아래에 있던 사람들에게 느티나무 아래는 공간이 아닌 장소가 되는 것이다. 소중한 의미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공간은 시간이 개입하지 않기에 이런 것이 없다. 장소에는 반드시 여러분의 추억이 개입된다. 한 편의 영화를 봤을 때 영화가 자기 마음 속을 파고든다면 그 영화는 추억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본인의 시간이 영화의 시간 속에 개입이 된다. 그때 영화관은 하나의 필름이 돌아가는 물리적인 공간에서 자신의 추억이 있는 장소가 돼버린다. T라는 시간의 축으로 순수한 공간을 뜻하는 원이 굴러간다면 그 원의 면적이 장소인 것이다.

 건축이 설계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건축은 공간을 만들어 낼 수 있지만, 시간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이것이 공간과 시간의 차이점이다. 건축은 공간을 만들어 놓고, 시간을 기다린다. 신혼부부가 함께 살 공간을 만들면 그 공간에서 아이도 낳고 학교에도 보내고 시간이 흐르며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건축은 시간을 설계할 수는 없지만 예상할 수는 있다. 하지만 거의 불가능한 예상이다. 건축은 늘 공간이며, 시간에 대해 절망할 수밖에 없다. 시간에 대해서 무능력한 존재인 것이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의 시간=우리가 알고 있는 좋은 디자인은 대부분 3차원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혁신은 3차원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4차원에서 보고, 3차원적으로 해결을 해내는 것이다. 3차원에서 벗어나 여러 차원까지 가지 못하면 3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무것도 없다. 거기엔 여러 가지 시간들이 있다. 사람들이 가장 지배당하는 시간은 크로노스의 시간이다. 크로노스의 시간은 그냥 지나가는 시간이다. 시계바늘처럼 탁탁 지나가는 시간들, 사람들을 관통하며 지나가는 시간이며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떻게 하다 보니까 시험 칠 날이 다가오고, 시험공부는 안 했는데 큰일이다’ 이런 것이 다 크로노스의 시간이다.

 그런데 카이로스의 시간은 크로노스의 시간처럼 무자비하게 흘러가는 시간이 아닌 의미 있는 시간이다. 이 시간은 아무리 오래 걸려도 여러분을 잡아먹지 않는다. 그런데 크로노스의 시간은 크로노스가 포세이돈이나 헤라를 잡아먹었던 것처럼 여러분을 다 잡아먹는다. 우리는 대부분 크로노스의 시간에 대부분 먹히며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항상 고통스럽다. 그런데 카이로스의 시간은 소중하고 황홀하기까지 하다. 그 시간은 아무리 많이 흘러도 사람들에게 공포, 아픔, 고통을 주지 않는다. 우리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어떻게 만날 것이냐에 대한 생각을 해야 한다.

 이 카이로스의 시간은 ‘삑사리’에 의해 나타난다. 이 단어는 봉준호 감독에 의해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게 됐다. 영화 <살인의 추억> 초반에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송강호가 논에서 조사할 때 카메라는 송강호를 비춘다. 근데 저 뒤에서 변희봉이 논둑으로 내려오다가 미끄러진다. 프랑스 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 인터뷰 도중 영화 비평가들은 이를 두고 의도한 장면이냐고 묻자 봉준호 감독은 ‘의도한 것이 아닌 삑사리였다’고 답했다. <카이에 뒤 시네마> 기자는 봉준호 감독의 가장 큰 영화 개념을 ‘삑사리즘’이라고 썼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여러분이 계획한 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삑사리에서, 우연에 의해서 나온다.

 여러분이 크로노스의 시간에 집착하다보면 카이로스의 시간이 오더라도 그 순간을 그냥 지나쳐버린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우리에게 굉장히 우스꽝스럽고 하찮은 것처럼 보이지만 카이로스의 시간이 나타났을 때 우리는 그 시간과 대화를 해야 한다. 동양고전 「주역」의 핵심은 바로 카이로스의 시간을 포착하는 것이다. 노자에서 하늘은 시간이고 땅은 공간이다. 천에는 시간의 형용사, 땅에는 공간의 형용사가 써 ‘천구지장’가 돼야하지만 ‘천장지구’라고 쓴다. 단어를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아 붙였다. 이는 시간과 공간이 서로 얽히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이 서로 얽히게 되면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 지평의 인식을 확장한다.

 크로노스의 시간에서 매번 삑사리를 기대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무자비하게 지나가는 크로노스 시간과 대적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발명해야 하는가? 노자의 ‘천장지구’와 허먼 멜빌의 소설「필경사 바틀비」에 나오는 ‘나는 안하고 싶습니다’와 같은 문법을 쓰는 것이다. 까뮈의 소설 「이방인」이 서유럽을 강타했다. 그 이전까지 근대 소설은 모든 것이 정확하고, 시간의 흐름이 들어맞아야했지만 까뮈의 이방인은 그렇지 않다. 주인공은 자기가 무엇을 했는지도 모른다. 이는 동양에선 특이하지 않지만 서양에선 특이한 일이다. 근대의 서유럽의 정신·이성을 깨버린 것이다. 시간체계가 확고한 근대에서 시간은 돈이다. 사람들은 시간을 잘 활용해야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남근숭배 중 하나다. 시간이 숭배되면서 사람들은 근면성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토끼와 거북이’에서 거북이는 성실하게 완주했지만, 휴식을 취한 토끼는 경기에서 진다. 이는 근대가 만들어낸 엉터리 신화이다.

 우리나라엔 ‘잠자미’라고 번역된 「프레드릭」이라는 동화가 있다. 개미와 베짱이를 변형한 들쥐 이야기이다. 들쥐들은 일하러 나가지만 잠자미는 바위에 앉아 졸기만 한다. 들쥐들이 무엇을 하고 있냐고 묻자 잠자미는 햇빛을 모으고, 꿈도 모은다고 답한다. 개미와 베짱이에서 개미는 일하지 않는 베짱이를 비웃지만, 들쥐들은 잠자미를 놀리지 않는다. 겨울이 길어져 비축해 놓은 식량이 다 떨어지자, 들쥐들은 대책 회의를 열었다. 매번 무언가를 모으고 있는 잠자미에게 부탁해 모은 것을 나눠달라고 말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잠자미는 모아둔 이야기를 나눠주기 시작했고, 마지막은 모두가 꿈을 꾸듯 행복한 겨울을 보냈다. 베짱이는 음악을 연주하다가 얼어 죽는다. 이것이 근대가 주장하는 시간의 남근 숭배적인 사상이다. 일하지 않으면 죽는 것이다. 잠자미의 세계관은 다르다. 잠자미의 세계에서 그 누구도 잠자미를 욕하지 않으며, 타인을 존중하는 사회다. 이는 굉장히 좋은 사회이다. 우리 사회는 개미와 베짱이의 사회를 벗어나고 있다. 크로노스의 시간에서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진입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이 이를 강화하게 될지, 방해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카이로스의 시간에서 나타나는 자신을 만나야 할 때다.

 

곽미경 기자  hd32222487@y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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