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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루가스 냄새나던 6월, 민주화를 쟁취하다
  • 곽미경 기자, 박승환 기자
  • 승인 2017.06.04 15:19
  • 호수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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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그해 초여름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1987년 6월, 전국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민들의 움직임이 일었다. 시민들은 군부정권의 독재에 맞서 피와 땀 그리고 눈물을 흘렸고, 끊임없이 민주화를 외쳤다. 이것이 우리나라에 민주화 바람을 몰고 올 ‘6월 민주항쟁’이다.

 어느 6월, 민주화를 위한 간절한 외침=1980년, 권력을 잡은 전두환 정권은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부정권에 맞서 시위하는 광주시민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고향이 광주인 구춘권 교수(정치외교학과)에 따르면 단지 광주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에겐 전담경찰이 붙었고, 시위가 일어나면 경찰들이 본인의 하숙집을 기습하는 일이 빈번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회에서 당시 서울대학교 학생인 박종철 열사가 고문을 받고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시민들은 전국적으로 분노했고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났다.

 6월 민주항쟁은 1960년 대학생이 주체가 된 4·19혁명과는 달리 다양한 연령대의 시민들이 민주화를 위해 거리로 나왔다. 경찰과 대치 중, 당시 연세대학교 학생이었던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아 숨진 사건을 발단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시위에 함께했다. 결국 ‘*6·29 민주화선언’과 함께 전두환 정권이 물러나며 6월 민주항쟁은 막을 내렸다.

 전문가들은 6월 민주항쟁이 현대 민주주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평가한다. 신형식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장은 “당시 변경된 대통령 직선제 개헌 체제는 오늘날까지 지속돼 군부독재를 몰아내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구춘권 교수는 “그해 12월, 군인 출신 노태우가 정권을 잡으며 군부정권을 완전 추방하지 못했다”며 6월 민주항쟁의 한계를 꼬집었다.

 대구·경북의 민주 항쟁=민주화를 위한 움직임은 대구·경북 지역에서도 활발히 일어났다. 6월 10일, 대구 한일극장에서 시민 1,000여 명이 모여 시위를 했고, 경찰들이 이를 제지하자 시민들은 대구역, 시청, 반월당, 칠성시장 등으로 장소를 옮겨가며 기습시위를 펼쳤다. 15일에는 대구·경북의 5개 대학교가 연합 시위를 도모해 경북대학교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 우리 대학교 학생들은 시험 거부 및 강의실을 폐쇄하는 일이 벌어졌다. 또한 18일 ‘최루탄 추방의 날’에는 대구시민 1만여 명이 2개의 파출소를 불태우고 3개 파출소를 공격했다. 20일에는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대구지부 어머니 부대’가 집회를 저지하는 경찰들에게 꽃을 나눠주며 대구 동성로에 위치한 동아 백화점부터 대구 YMCA까지 행진했다. 전두환의 지지 기반인 대구·경북 지역에서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시위가 일어난 것에 대해 김태일 교수(정치외교학과)는 “이는 민주화를 위한 시민들의 열망을 보여주는 것”이라 말했다.

 한편 대구·경북 지역 상인들은 학생운동을 하는 대학생들에게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대구시민 A 씨는 “최루탄이 터지면 상인들이 학생들에게 최루가스를 씻어 낼 수 있는 물, 우유, 사이다 등을 제공했고, 경찰의 눈을 피할 수 있게 몸을 숨겨줬다”고 전했다. 반면 대구시민 B 씨는 “학생운동을 막기 위해 서문시장 상인들이 식칼을 들고 대치하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김태일 교수는 “청년들이 오늘날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음을 기억하고,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6·29 민주화선언: 1987년 6월 29일 노태우가 국민들의 민주화와 직선제 개헌요구를 받아들여 발표한 선언

그날을 기억하기 위한 노력

 2007년, 6월 민주항쟁은 국가기념일로 정식 지정됐다. ‘6·10 민주항쟁’ 20주년 기념사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6월 민주항쟁이 군사독재의 뿌리를 끊어내고 민주주의를 꾸준히 발전시키는 계기가 됐기에, 특별히 기억에 새겨 두어야 할 의미가 있는 역사라고 말했다.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난 지 30년이 지난 지금, 항쟁을 기억하기 위한 움직임에 대해 알아봤다.

 87년을 기억하기 위한 전국적인 움직임=서울, 부산, 충남, 광주·전남 등 전국 각지에서 30주년을 기념하고 시민의 참여를 높일 수 있는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 4월부터 ‘6월 민주항쟁 30주년 기념사업 충남추진위원회(이하 충남추진위)’가 발족돼 민주항쟁 30년 충남 기념식·표석 제막식, 기념 증언·강연회 등의 행사를 개최할 계획이다. 기념행사가 끝난 후에도 충남추진위에서는 단체를 ‘충남 민주화운동 기념 사업회’로 전환해 민주시민 양성을 위한 노력을 지속할 예정이다. 이에 이용길 충남추진위 상임위원장은 “6월 민주항쟁과 촛불혁명은 절차적 민주주의를 완성하고자 하는 시민혁명이었지만, 내용적 민주주의 발전이 병행됐는지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며 “이번 기념사업이 내용적 민주주의 발전을 실천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또한 지난 4월 ‘6월 민주항쟁 30년 부산사업추진위원회’가 발족돼 광복로에서 문화콘서트를 비롯한 노동자 대투쟁 기념 연극, 민중미술 2017 등의 행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지선희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사무차장은 “1987년은 7·8·9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노동운동 역사에 대전환을 만든 시기이기도 하다”며 “이를 기념 계승하기 위해 9월에 노동운동과 관련된 다양한 사업이 진행된다”고 전했다.

 한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는 시민의식종합조사와 함께 구술 사업을 추진하는 중이다. 구술 사업은 6월 민주항쟁에 참여했던 인사들의 생생한 증언을 채록해 민주화운동 연구의 기초자료를 마련하기 위함이다. 양경희 사료관 구술담당자는 “항쟁 당시 기록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이 많다”며 “민주화운동은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데에 기둥 역할을 하며, 그 당시 채록은 민주주의의 발판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청년을 대상으로 기념행사를 진행하는 대구=우리 대학교 학생 201명을 대상으로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난 배경에 대해 아시나요?’에 대해 앙케이트를 진행한 결과, ‘그렇다’로 대답한 학생이 72.6%(146명)로 절반을 넘었다. 하지만 ‘아니다’로 대답한 학생이 27%(55명)로, 적지 않은 수의 학생이 항쟁이 일어난 배경을 알지 못했다. 6월 민주항쟁을 사람들에게 좀 더 알리기 위해 대구에서는 대구참여연대, 30년 행사위원회, 4·9인혁재단 등 여러 단체들이 모여 표석을 세우는 등의 기념사업을 진행 중에 있다. 박근식 대구참여연대 집행위원장은 “6월 민주항쟁은 촛불혁명의 발판이 됐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대구참여연대에서는 청년을 대상으로 한 6월 민주항쟁 기념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87년 당시 항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구술을 채록해 책으로 발간할 예정이며, 인터뷰를 영상으로 담아 청년들이 직접 영상을 제작하고 상영할 계획이다. 또한 대구 기록물을 찾고, 민주주의 토크콘서트도 진행된다. 이는 아름다운 재단에서 후원을 받아 진행 중이다. 최나래 활동가는 “지금 촛불에 참여한 청년들이 교과서로 6월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발로 뛰어 6월 민주항쟁을 피부로 느끼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우리는 운동권입니다”

 1987년 6월, 우리 대학교에서 학생운동이 많이 진행됐다는 기록은 있지만, 학교 내에서 있었던 자세한 상황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에 우리 대학교 동문인 남태우 씨(경영학부 85학번)와 이용석 씨(기계공학과 85학번)와의 좌담회를 통해 당시 우리 대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들어봤다.

 학생운동을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이용석: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 운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인지하지 못했다. 나는 우연히 광주에서 일어난 일을 알게 됐고, ‘어떻게 우리나라 군인이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할 수 있을까’란 의문이 들었다. 그 후 군부정권 퇴진을 위한 학생운동에 가담하게 됐다.

 남태우: 나 또한 마찬가지다. 당시 광주의 실태를 사진으로 담은 광주 사진전을 접하고, 충격에 휩싸였다. 이를 계기로 군부정권의 비정당성을 깨달았고,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당시 우리 대학교의 분위기는 어땠는가?

 이용석: 과거 교내 직원은 재단을 통해 채용돼 시위에 굉장히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많은 교수들은 용감히 군부정권을 비판하고 학생운동을 지지했다. 또한 당시 총장은 셔틀버스와 교내 주유소를 제공하는 등 많은 지원을 해 줬다.

 당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가?

 남태우: 시위 중 보도블록을 깨 경찰에게 던지는 일이 빈번했다. 당시 노천강당을 짓기 위해 교내에 건설용 자갈을 산처럼 쌓아놨었다. 이것을 학생들이 시위 중 경찰에게 던졌고, 경찰들의 방패가 깨져 그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한 사건도 있었다.

 학생운동에 대해 가족들의 반응은 어땠는가?

 이용석: 당시 60대 중반의 아버님께서 나를 잡으러 학교에 오신 적이 있었다. 한창 혈기왕성한 20대 초반의 청년과 환갑을 넘은 장년층의 추격전이었는데도 정문에서부터 캠퍼스를 돌고 돌아 결국 음악대 앞에서 잡혔다. 아들이 구속돼 고문을 받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 것이다. 아직도 아버님 기일 때마다 그 장면이 생각난다.

 남태우: 내 경우는 조금 달랐다. 어머니께 “점거 농성이 길어져서 집에 못갈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면 내 활동을 이해해 주셨다. 그리고 대학교 1학년 시절에 경찰에 구속돼 15시간 조사를 받을 때, 어머님께서 옆에 함께 계셔서 폭력적인 조사는 피할 수 있었다.

 ‘6·29 민주화선언’과 함께 6월 민주항쟁이 끝났다. 당시 심정은 어땠는가?

 이용석: 첫 번째로 군부정권을 굴복시켰다는 생각에 기뻤다. 두 번째로 굉장히 지쳤다. 거의 2개월 동안 하루에 6시간씩 확성기를 들고 거리를 뛰어다녀 온몸의 힘이 다 빠진 상황이었다.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감정이 북받쳐 온다.

 마지막으로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용석: 당시 군부정권이 민주주의를 억압한 것은 시민들의 정치적 무관심이 불러온 폐해라고 생각한다. 청년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고, 국가권력을 항상 견제해 과거와 같이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일이 없길 바란다.

 

곽미경 기자, 박승환 기자  hd32222487@ynu.ac.kr, sh90822@y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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