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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로를 거닌 사람] “열악한 환경에도 대금을 놓지 않았죠”
  • 이경희 기자, 지민선 기자
  • 승인 2017.11.27 20:26
  • 호수 1640
  • 댓글 0

  우리 대학교 국악과를 졸업한 배병민 동문(국악과99)은 현재 대구시립국악단 소금 수석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지난 2015년에는 대금 독주회를 열기도 했으며 많은 연주자들과 협연 무대를 선보이고 있다. 이에 배병민 대금 연주자를 만나 대금 연주자가 되기까지의 과정과 대학 생활, 그의 목표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본인을 간단하게 소개해주세요

 제 이름은 배병민이고, 영남대학교 99학번으로 입학해 대금을 전공했어요. 현재 대구시립국악단에서 소금 연주자로 활동 중이에요.

 대금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초등학교 6학년 때 절에서 불교 학교를 갈 일이 있었어요. 대략 3년 정도를 다니며 목탁도 치고 여러 활동을 접할 수 있었죠. 그러던 와중 어떤 선생님께서 단소를 가르쳐 주셨고, 이 일을 계기로 단소를 배울 수 있었어요. 단소를 배우다가 중학교 2학년 설날에 친척들에게 받은 용돈으로 플라스틱 대금을 사서 연주하게 됐고, 취미로 배우던 대금이 어느 순간 제 전공이 돼 있더라고요.

 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할 즈음인 중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서 “넌 머리가 좋으니까 공부를 해봐라”고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저는 단박에 “싫어요”라고 대답했죠. 예술고등학교(이하 예고)에 진학하고 싶었으니까요. 이 얘기를 들은 선생님은 바로 제 부모님을 호출시켰어요. 어머니는 제 꿈을 지지해주셨고, 그렇게 예고를 가게 됐어요.

 국악인을 제외하고 다른 꿈을 가졌던 적이 있으셨나요?

 어릴 때는 경찰에 대한 꿈이 강렬했어요. 제 생김새도 형사 이미지와 비슷하거든요.(웃음) 음악을 하고 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어요. 단소를 처음 접했을 때 ‘아 이건 내 것이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이후로 다른 꿈을 가진 적은 없어요.

 우리 대학교 국악과에 입학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고등학교 2학년 때, 우연찮은 계기로 경북 도립국악단과 협연을 하게 됐어요. 거기 지휘자 선생님이 현재 퇴직하신 영남대학교 교수님이셨어요. 그때를 계기로 우리 대학교에 관심을 가지게 됐죠. 집이 가난하던 탓에 어머니께서는 국립대인 경북대학교에 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유하셨어요. 하지만 좋지 못한 성적과 처음부터 영남대학교에 관심이 있던 저는 영남대학교에 합격하게 됐고 어머니께는 1학기분의 등록금만 내주시면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다고 설득시켰죠. 우여곡절 끝에 우리 대학교에 오게 됐어요.

 대학 시절에 가졌던 목표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대학교 2학년 전까지는 목표랄 게 없었어요. 금전적으로 부족한 탓에 굉장히 바쁘게 살았기 때문이죠. 수업은 수업대로 다 듣고 레슨하고 밤 9시부터 새벽 5시까지 편의점 알바를 하기 바빴어요. 그때 시간당 1,900원밖에 받지 못했어요. 밤에 잠을 잘 수도 없었고 일하고 공연하고 돈 버는 것에 급급했던 때였죠.

 당연히 공부에 소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재학 중 1.95라는 좋지 못한 성적을 받은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대회를 나가고 상을 받게 되며 삶의 목표를 찾기 시작했고, 이러한 과정을 학과 교수님께서 많이 도와주셨죠. 또한 석사, 박사 과정을 전부 우리 대학교에서 밟게 됐는데 그제야 공부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더라고요.

 등록금을 갚아 내는 것, 대금을 하는 것 말고는 대학 시절 중 즐긴 것이 있나요?

 없어요. 저는 정말 빠른 시기에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고, 죽을 힘을 다해 열심히 살았어요. 25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직장에 들어가고 생계를 유지해야 했고, 그 이후 결혼을 했어요. 그렇다 보니 이십 대만이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못했던 것 같아 아쉬워요. 그래서 제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자주 하는 얘기가 “이십 대에만 할 수 있는 것을 해라”에요.

 현재 우리 대학교 출강을 하고 계시는데, 본인의 재학 당시와 현재의 학교 모습의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제가 재학할 당시에는 선배들과 동기들 간의 끈끈한 정이 있었어요. 교수님들과 같이 공연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고, 학생과 교수와의 소통이 원활해 서로 궁금한 것을 질문하는 등의 학생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것들이 많았죠. 현재는 그런 게 많이 없어진 것 같아 아쉬워요.

 그런 후배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시고 싶으신가요?

 감나무 밑에서 입을 벌리고 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면 안 돼요. 세상에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음을 명심해야 해요. 수업시간에 시간 때우고 가는 것을 당연시하는 일부 학생들을 보면 조금 안타까워요. 취업이 잘 되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을 원망하기보다는 본인이 조금 더 열심히 해서 길을 찾아야 해요. 그렇게 하면 십 년 뒤에는 가진 자만의 비애를 느낄 수 있을 거예요.

 본인에게 영남대란?

 전 뼛속부터 영대인이에요. 속된 말로 ‘영남대 빠’라고 할 수 있죠. 대학을 졸업하면 학교에 올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건 제 착각이었어요. 99년부터 지금까지 19년을 계속 학교에 나오고 있어요. 그렇다 보니 당연히 학교에 애정을 가지게 됐고, 후배들에게는 뭐든 다 주고 싶은 공간이죠.

 현재 대구시립국악단 소금 수석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수석 단원이 되기 위한 과정은 무엇이고 어떤 역할을 하나요?

 가야금, 거문고, 피리, 아쟁 등과 같은 다른 파트는 파트 단원들이 8~9명 정도 되요. 그 단원들을 2년에 한 번씩 오디션을 봐요. 실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단원에게는 경고를 부여해 정해진 기간 뒤에 다시 오디션을 보죠. 또한 그 오디션에서 성적이 가장 좋은 사람에게는 수석을, 그 다음으로는 차석의 자리를 주며, 수석이 그 파트의 책임자가 돼 단원들을 연습시키고 있어요.
하지만 소금은 1명의 단원만 모집해요. 파트 단원이 혼자라고 무조건 수석을 주는 것은 아니에요. 오디션을 봐 성적순으로 수석, 차석, 평단원을 받게 되고 실력이 좋지 않을 경우에는 경고가 부여되기도 해요.

 다른 파트와 달리 혼자서 소금 파트를 이끌어가는 것에 대한 힘든 점은 없나요?

 무지하게 힘들어요.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도 사람인지라 종종 실수할 때가 있어요. 다른 파트의 경우 연습이 충분히 되지 않으면 다른 단원에게 묻어갈 수도 있고 실수를 하더라도 티가 나지 않지만, 소금은 저 혼자다 보니 실수하게 되면 전 단원이 저만 보고 있어요. 그럴 때는 얼굴에 피가 날 정도로 빨개지고 비 오듯이 땀이 나요.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새로운 곡이 나오면 총보(모음 악보)를 들고 소금 악보와 비교해 본 뒤, 소금 솔로가 어디에 언제 나오는지 확인한 뒤 다 체크해둬요. 솔로가 나올 경우, 그 부분만 집중적으로 연습을 하는 편이에요. 솔로가 나오기 네 마디 전부터 심박 수가 급격하게 올라가요.

 그래도 혼자 해서 좋은 점도 있어요. 남아서 다른 단원과 맞춰보지 않아도 되고, 해외공연을 가게 될 경우 소금은 무조건 참여해요.

 대금 연주자로 활동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무대에 정말 많이 올라가요. 한 달에 5~6번은 무대를 올라가기 때문에 기억도 잘나지 않아요. 그래도 한 무대를 뽑자면 날짜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2001년 5월 24일, 제가 상을 받았던 대회의 본선 무대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당시 가야금, 거문고, 해금, 피리·대금 부문 또한 본선을 함께 했는데 제가 그 본선 무대에 서던 날에 대상 심사도 같이했어요. 본선 무대를 하러 올라갔고 한 산조를 연주하는데 대략 10여 분이 걸렸어요. 그동안 땀을 엄청나게 흘린 것 같아요. 그 후 결과 발표가 났어요. 금상 영남대학교 배병민… ‘와 이제 군대 안 간다’는 생각에 너무 기뻤어요.

 혹시 본인이 생각하시는 롤모델이 있으신가요?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지금은 한양대학교 국악과로 가신 안성우 교수님이 계세요. 저는 아버지 말고 아버지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어머니 아버지는 세상에서 단 한 분밖에 없으니까요. 하지만 거기에 버금갈 분이 저희 선생님이세요. 안 선생님은 저에게 대금만 가르쳐주신 게 아니라 인생을 가르쳐주신 분이에요.

 제가 너무 어렵게 살아서 대회를 나가라고 권유하셨어요. 그 당시 제가 가장으로서 한 달에 150만 원 정도를 집에 갖다 드렸는데 어머니께 대회를 나가야 해서 당분간 돈을 못 벌어주겠다고 얘기했어요. 처음에 어머니는 안 된다며 힘들다고 얘기했지만, 저의 미래를 위해 허락해주셨어요. 결국 선생님이 권유한 대회에서 상을 받고 군대에 가지 않았죠. 뿐만 아니라 저에게 경제적인 면에서도 도움을 주셨고, 현재 저의 직장인 대구시립국악단에 들어올 때도 자신감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셨어요. 그만큼 저의 인생 전반적인 부분에서 코치를 해주셨어요. 그리고 항상 힘들 때 ‘위기는 기회다’라는 말씀을 해주셨고, 그 말을 늘 되새기며 무엇이든 헤쳐 나가고 있는 것 같아요.

 대금 연주자로 활동하며 힘든 점은 없었나요? 그리고 그러한 어려움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었나요?

 연주자, 예술인으로 힘들 때는 공연이 많을 경우 그 공연을 모두 완벽히 해내기 위해 힘들어요. 몸이 힘들죠. 하지만 그건 정신적으로 힘들지 않아서 괜찮아요. 정신적으로 힘들 때는 ‘내가 노동자인가? 예술인인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 문장은 제가 직장에 입사하기 위해 면접을 볼 때 받은 질문이에요. ‘배병민 씨는 대구시립국악단원이 노동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어요. 저는 단호하게 ‘대구시립국악단원이 노동자라고 생각한다면 이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라며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죠. 노동자라고 생각한다면 돈을 쫓아가야 하고 예술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음악만 하면 돼요.

 무대에서 많은 공연을 한 만큼, 에피소드도 다양할 것 같습니다. 무대에서 실수하신 적은 없나요? 그럴 때는 어떻게 대처했나요?

 실수한 적 엄청 많죠. 예를 들어 무대 위에서 공연을 하다 실수를 할 경우, 지휘자랑 눈이 마주치면 안 돼요. 지휘자랑 눈이 마주치면 그 뒷부분도 실수할 가능성이 커요. 실수하면 실수한 대로 넘기고, 남은 공연을 무사히 마쳐야 해요. 만약 크게 실수를 하면 시말서를 써야 해요.

 국악인으로서 국악 철학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음악에는 전통 국악과 창작 국악이 있어요. 요즘에는 크로스오버, 퓨전 등이 유행하잖아요. 제가 부족해서 이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창작 국악을 연주하지 않아요. 직장에서는 관현악과 함께 무대를 준비하며 창작 국악을 연주하기도 하지만 저의 음악을 할 때는 전통 국악만 해요.

 전통 국악만 평생 해도 전통 국악이 가지고 있는 본래 철학을 10분의 1도 이해를 못 할 것이고. 평생 하면 맛이나 볼까 할 정도라고 생각해요. 또한 전통 국악을 완벽히 할 줄 알아야 창작 국악을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전통 음악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창작 음악을 한다는 것은 한국인이 한글을 완벽하게 하지 못하는데 영어를 하는 것과 같은 것과 같은 개념이죠. 저는 매우 보수적이라서 모든 일에는 순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기초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현재 한국의 국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우리나라가 국악을 대하는 자세에서 아쉬운 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심각하죠. 국악을 하는 사람도 문제고 국악을 대하는 국민들의 자세도 문제라고 생각해요. 국악을 하는 사람의 입장으로 봤을 때, 우리나라가 국악을 대하는 자세는 정말 좋지 못해요. 자녀가 바이올린을 하고 싶다고 사달라고 하면 백만 원짜리 바이올린도 사줘요. 하지만 자녀가 학교에서 단소를 하니 사달라고 하면 제일 싼 걸 사라고 하죠. 정말 국악인으로서 자존심 상하는 일이에요. 국악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었지만 아직 국악은 천하다는 생각이 남아있는 것 같아요.

 앞으로의 구체적인 계획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제자들을 잘 키우는 게 저의 목표이자 계획이에요. 제가 생각하는 선생님이란 제자가 직업을 가지고, 집을 장만하고, 결혼을 해야 스승으로 해야 할 도리를 다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제자가 잘된 걸 보면 너무 뿌듯해요. 그래서 정말 열심히 가르쳐서 저보다 더 뛰어난 제자를 많이 육성시키는 게 저의 가장 구체적인 계획이에요.
 

인터뷰를 마친 기자들의 이야기
 

 그 날은 밀려드는 과제와 신문사 일로 인해 힘들었던 하루였다. 하지만 배병민 동문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하니 그 생각은 금방 지워졌다. 배병민 동문은 당시 힘들었던 나에게 활력을 불어 넣어줬다. 인터뷰를 마치고 인터뷰를 같이 진행한 동기와 신문사로 돌아오는 길에 “근래 힘들었던 나에게 가장 큰 힐링이었다”며 이야기를 나눴다.

 인터뷰 당시 만났던 배병민 동문은 반짝반짝 빛났다. 그는 본인의 직업을 사랑하고, 사람 간의 관계를 중요시 여기며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인터뷰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내가 생각하는 스승은 제자가 직업을 가지고 집을 장만하고 결혼을 하며 잘 사는 모습을 보아야 도리를 다한 것이다”라는 말이었다. ‘그런 스승을 만나고 싶다.’ ‘그런 스승이 되고 싶다.’ 인터뷰를 한 지 며칠이 지난 지금도 필자의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이다.

 또한 굉장히 좋지 못한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성공하려 죽을힘을 다해 노력하고 결국 성공을 거둬낸 그를 보며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밖에는 할 수 없었다. “잘 되려면 그에 마땅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가 했던 말처럼 십 년 뒤에 가진 자의 비애를 가질 수 있도록 필자도, 그리고 독자들도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이경희 기자, 지민선 기자  lkh1106@ynu.ac.kr, jms5932@y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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