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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회 천마문화상 - 가작(평론)]죽음; 어딘가에 남아 있을 죽음의 봉오리를 위하여
  • 하지은(영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4)
  • 승인 2017.12.02 14:32
  • 호수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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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날, 죄 없고 가여운 것의 죽음을 목격하고 죽음에 대해 의문이 생겼다. 왜 죽음은 불시에 찾아와 아무 이유 없이 이루어질까……. 인간은 모두 태어나서 죽는다. 태어나면 죽어야 한다는 것은 자연적인 법칙이다. 태어나면 죽어야지 한 생애가 완성된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죽음은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일상의 삶에 갑자기 불어온 죽음은 완전하지 못하다. 각자에게 주어진 삶을 다 살아내지 못하고 어느 날 갑자기 죽는 것은 이상하다. 갑작스러운 죽음은 자살과 타살,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인간은 스스로를 파괴할 권리가 있고 파괴의 극점은 죽음에 있을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 때문에 타인을 죽이기도 한다. 나를 스스로 죽음으로 끌고 갈 권리와 타인의 욕망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현상에는 모두 사회의 비극이 스미어 있다. 나머지 삶을 잘 살 것이라고 믿지 못해 스스로 죽고 내 욕망의 발현이 들킬까봐 타인을 믿지 못해 죽인다. 우리는 왜 이토록 불신하며 살아가는가. 나도 믿지 못하고 남도 믿지 못하는 세상에서 죽음은 잘못해서 오는 것만이 아니었다. 불신의 사회에서는 죄가 없어도 죽는 것이었다. 무자비한 죽음의 속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무기력한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용납할 수 없는 죽음들이 있고 그것은 오늘날 사회와 인간의 삶에 비극의 메아리로 울리고 있다. 온전한 죽음을 위해서는 자연과 문학에 닿아 있고 사랑의 가치를 실현해야 할 것인데. 그 이전에 그 죽음의 파편으로 자리하는 것들을 제대로 목격하는 진실의 눈동자를 가져야 한다.

 1. 죽음에 대한 의문

 
그 날은 여전히 추웠던 지난겨울이었다. 본관 뒤에 밥을 먹으러 가는 저녁에 차가운 주검을 목격했다. 미대 쪽에서 중앙도서관으로 가는 차도의 문구점 앞 쪽에 새끼 고양이가 죽어 있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밥을 먹으러 가는 길에 본 너무나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멀리서부터 느껴지는 예사롭지 않은 느낌에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차가 다니는 길목에 미동 없는 무엇이 널브러져 있었다. 어미 고양이는 어찌할 줄 모르며 앞발로 새끼 고양이 쪽의 허공을 더듬고 있었다. 어둠이 깔린 캠퍼스에는 차들이 달리고 있었다. 어두워서 보지 못했는지 혹은 봤는데 그냥 치고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쌩쌩 달리는 차에 작은 새끼 고양이가 치인 것 같았다. 그 곁을 어미 고양이는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어미는 이미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새끼를 만지지도 떠나지도 못하고 새끼의 언저리를 따라 허공만 더듬고 있었다.

 그날로부터 얼마 전 캠퍼스에는 새끼 고양이가 태어나 학우들의 사랑과 귀여움을 듬뿍 받고 있었다. 학교의 길마다 어미를 따라가는 새끼 고양이의 작은 모양새가 학우들의 눈길을 끌었다. 사람들은 귀엽다고 다가가지만 지나치며 볼 때마다 새끼 고양이는 두려움에 가엾게 떨고 있었다. 길을 가다가도 어미는 도로를 건넜는데 새끼 고양이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겁을 먹고 멈칫거리다 뒤로 도망가 버리는 모습을 여러 번 봤다. 나는 평소에 너무나 끔찍해서 고양이를 제대로 보는 것조차 힘든데 그런 모습을 보니 끔찍하다는 생각보다 가엾고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최근에는 새끼 고양이들의 작은 움직임이 아주 조금 앙증맞다는 생각을 했고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들 때문에 고양이들이 가여웠다. 그런데 그런 새끼 고양이가 죽었다. 흰 털엔 붉은 피가 물들어 있었다. 학교 kt텔레캅에 신고를 하며 위치 설명을 하고 있는데 검은색 큰 차가 쌩하고 그 주검 위를 지나갔다. 나는 보지도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몇몇 차가 멈칫거리다 돌아가고 있었는데 결국 또 한 대의 차가 그 위를 무참히 지나고 말았다. 친구에게 물으니 어미 고양이도 약간 치였는데 어딘가로 도망갔고 새끼 고양이는 그 바퀴에 다시 깔렸다고 했다. 전화에 대고 제발 빨리 와달라고 하고 친구들을 따라 다시 식당으로 향했다.

 그렇게 사랑받던 작은 새끼 고양이가, 멀리서 보던 귀여운 것들이 길가에 죽어 있었다. 그 아이는 무슨 죄일까. 캠퍼스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았지만 결국 위험에 노출된 날 것의 생명체였다. 차가 많이 다니는 캠퍼스 안에서 그 작은 것들이 받을 수 있는 배려와 보살핌은 아주 작은 것들이었나 보다. 사료나 물은 다 부질 없는 것이고 그들 스스로 매일매일 삶과 죽음 사이에서 위태롭게 살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보니 그 자리엔 주검이 치워져 있었다. 그냥 먹고 자고 번식하고 본능적인 것만 하는 생명체들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춥고 어두운 날 싸늘한 주검이 된 것일까. 처음 새끼 고양이를 친 차와, 그 위를 다시 한 번 빠르게 밟고 지나간 검은색 차의 주인들은 자신의 행위를 알고 있을까. 그들의 행위는 죽음의 원인이었다. 새끼 고양이를 죽인 것은 바퀴인가 사람인가. 새끼 고양이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앞뒤에서 차가 오는데 어린 것을 두고 가지도 못하고, 만지지도 못하고 어찌할 줄을 모르던 어미 고양이는 어디서 어떻게 되었을까. 새끼를 잃었지만 내일 또다시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겠지. 아니면 그 슬픔으로 굶어 죽을까? 차에 치여 버릴까? 어미의 삶은 어떻게 되는 걸까. 그날 밤 이불을 끌어안고 그 마음을 생각해보다가 가슴이 사무치고 슬퍼서 눈물이 났다. 내가 감히 헤아릴 수도 없는 마음이다. 그때는 한창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 실체가 언론보도로 드러나던 때였다. 세상에 온갖 죄악을 스스럼없이 자행한 사람들은 끈질기게 잘 먹고 잘사는데 왜 갓 태어난 새끼 고양이는 더 빛을 보지도 못하고 죽어야만 하는가.

 12월의 첫날, 그 밤에 봤던 한 순간의 모습이 나를 눈물짓게 했고 아픈 내 가슴은 어느새 죽음에 대한 증오로 번져 있었다. 불시에 찾아온 죽음은 인위적인 것이었다. 인간은 자기의 삶을 위해 무수한 생명체들을 죽이며 살아간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삶은 무언가를 죽이는 것이다. 다른 존재의 죽음으로 나의 삶이 유지되고 있는 비극을 마주하는 순간 삶 자체가 고통이고 괴로움이 되었다. 삼겹살이 되어야 하는 돼지의 죽음과 캠퍼스에서 귀여움을 받다 차에 치인 새끼 고양이의 죽음은 다른가? 전자는 후자보다 죄책감이 덜 해도 되는 것인가? 생명에 중요함의 차이가 있는 것인가? 여러 의문이 들지만 이미 태어난 이상 삶을 부정하면 죽음만이 유일한 희망이 된다. 고민해야 할 문제이지만 이런 나약한 비약을 경계하고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해 짚어보려 한다. 새끼 고양이는 성체가 되지 못하고 어린 상태로 죽었다. 예기치 못한 죽음은 이상하다. 끝이 완성이 되지 못한 삶은 인간에게도 크나큰 비극이다.

 2. 자살: 스스로 선택한 죽음

 프랑스의 소설가 프랑수아즈 사강은 마약 투약 혐의로 체포되었을 때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했다. 인간은 타인의 욕망으로 태어났기에 그 이후에는 스스로를 파괴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 사회적으로 불법이라고 규정지은 것들에 반발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질서를 위해서는 건전한 규약이 필요하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 생을 끝낼 수 있는 것에 대한 논의는 부족하기 때문에 역으로 인간에 대한 존엄성 훼손이 우려된다. 한 사람의 고통을 고스란히 기쁨으로 채워줄 수 있는 타인은 없다. 100% 책임질 수 없다면 함부로 타인의 삶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자살방조죄나 안락사 등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더 필요하다. 자살하는 사람들은 사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떠나고 싶은 마음으로 스스로를 죽인다. 고통을 스스로 차단하는 결정을 보고 사람들은 흔히 안타까움을 느끼지만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 누구도 그 결정에 관여할 수 없다. 그들은 자신의 고통을 견디지 못한 것이고 앞으로의 자신을 믿지 못한 것이다. 고통을 견디고 다른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 미래를 계획하지 못하고 죽음을 택한 사람들은 나에 대한 불신으로 끝이 났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불신이 한 인간의 내면에서만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진공에서 태어나지 않는 이상 인간은 사회와 세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 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회를 들여다봐야 한다.

 이번 여름에는 유난히 고독사에 대한 뉴스가 많았다. 무더웠던 어느 날, 고시원에 살던 50대 남자가 아사한 채 발견됐다. 드나드는 사람이 없어 뼈와 가죽만 남은 상태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상당한 빚이 있는 상태였고 지갑에는 20만 원이 있었다고 한다. 내 아버지 또래의 남자가 고시원에서 아사했다는 뉴스를 보고 나는 그의 죽음이 자꾸 생각났다. 그는 지갑에 20만 원이 있었는데 왜 그 돈으로 배고픔을 채우지 않고 그냥 죽어버렸을까. 어차피 죽을 생각이었다면 지갑에 있는 돈으로 먹고 싶은 것을 실컷 먹어보기라도 하지. 아니면 값싼 음식들로 얼마간은 버틸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랬을까. 나는 너무 잘 먹는데 그 남자는 왜 배고픔으로 죽었을까. 나는 가끔 돈이 없어서 라면 하나로 하루를 때울 때면 늦은 밤에 갑자기 치미는 식욕과 짜증에 휴대폰으로 소액결제를 해서 배달음식을 먹는다. 나는 온갖 양념이 되어 있는 기름진 음식들을 집어 삼키고 배탈이 나는 것을 반복하며 내가 잘 살고 있는 것처럼 위안이라도 받고 있는데 그 아저씨는 왜 죽었을까. 어차피 빚이 많다면 당장의 욕구를 충족시키며 내일이 없듯이 살아보지. 나의 어린 생각은 여기까지였지만 그 남자는 그런 삶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다음의 삶에 대한 희망이 없었을 것이다. 요즘 뉴스에는 이런 고독사에 대한 보도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쪽방촌에서 백골시신으로 발견된 80대 남자, 숨진 지 넉 달 만에 심하게 부패한 상태로 발견된 60대 여성… 자식이 있어도 연락이 끊긴지 오래된 노인들의 고독사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최근 5년 사이 고독사를 포함한 무연고 사망자는 60%나 증가해 지난해에는 1200여명이 넘었다고 한다. 1인 가구가 증가하고 최근에는 청년들도 절연가구가 늘며 나이와 처지를 불문하고 고독사가 잇따르고 있다. 이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희망 없는 개인들이 좁은 방에서 죽어갈 때 국가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개인의 죽음을 파고들면 국가와 전체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이 생긴다. 진정한 자의가 아니었던 고독한 죽음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또 다른 자살이 있다. 계절의 여왕이라 불리는 5월, 캠퍼스가 푸르게 물들어가던 계절에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던 내 또래의 청년은 어머니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휴게소에서 목을 매 목숨을 버렸다. 공무원 시험에 계속 낙방하던 청년은 마지막으로 시험을 쳐보고 고향으로 내려가 일자리를 알아볼 계획이었다고 한다. 낙심하던 아들을 집에 데리고 가던 엄마는 가는 길에 아들을 잃었다. 청년은 휴게소 화장실의 청소도구함 칸에서 스스로 목을 맸다. 엄마는 휴게소 관계자들과 몇 시간을 찾아 헤매다 죽은 아들을 발견했다. 스스로에 대한 실망과 부모님에 대한 죄송함은 아직 여린 청년이 혼자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나 보다. 내 주변에도 노량진의 고시촌에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몇 달 만에 서울에서 돌아 왔다. 매일 표정 없이 컵밥을 먹으며 학원 수업을 듣고 공부하는 것을 반복하던 일상이 끔찍했다고 했다. 청년 실업에 대한 문제는 이제 청년들을 절벽 끝으로 몰고 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청년들이 죽음을 선택하고 있다. 빛을 보지 못한 젊은 죽음에 국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3. 타살: 타인에 의한 죽음

 국가가 생긴 이후 사회는 인간을 쉽게 죽인다. 2017년의 6월에도 국가권력에 의한 죽음은 여전하다. 얼마 전 6월 민주항쟁과 관련된 TV 프로그램들을 통해 그 당시 시위모습을 봤다. 지금은 내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그때 그 시절에는 벌어졌다. 길에서 일반 사람들이 최루탄 연기를 맞으며 시위를 하고 집을 뺏긴 빈민들은 시위대의 밥을 해먹이고 있었다. 여공들은 불합리한 노동체계에 반발해 농성하고 학생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독재정권을 타도했다. 시위가 장기전으로 흐르고 청년들이 거리에서 날밤을 새자 일반 국민들이 담배, 빵, 돈 등 힘이 될 만한 것들을 십시일반으로 모아 힘을 보탰다. 80년대 말에는 내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었다. 정부가 국민을 죽이고 국민은 서로를 의지했다. 그때는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성인으로 이 땅에 발을 딛고 있었다. 마치 영화 같다. 도저히 현실감각으로 느껴지지 않는 일들이다. 그 이후의 대한민국에는 민주화 물결이 정착했는가.

서로를 믿어주는 국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인 정부는 얼마 전까지 같은 모습이었다. 부자들은 더 잘 먹고 잘 살고 세금도 덜 내고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하청업체 노동자들은 여전히 과로로 죽어나간다. 재벌가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아무 노력과 이유 없이 최고급 차를 수집하고 최고급 명품을 입고 최고급 샴페인을 마신다. 용산에서 경찰은 컨테이너 안에서 농성하던 국민들을 죽이고 광화문에서 경찰은 물대포로 사람을 죽였다. 이것은 모두 다 현재진행형이지 6월 민주항쟁의 현장처럼 영화가 아니다. 거리에 날리던 유인물과 최루탄 연기가 없을 뿐 2017년의 대한민국은 무엇이 달라졌는가. 그런데 사실 달라진 것은 많다. 예전보다 먹고 살 만 한 것은 사실이다. 사람들의 소비도 상승했고 문화 예술에 대한 수요도 증가했다. 지난 날 풀로 밥을 먹던 시절에서 우리는 탄수화물과 지방의 영양과잉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급식소마다 음식물 쓰레기가 넘쳐나고 각종 패스트푸드와 온갖 휘황찬란한 먹거리가 식탁을 점령했다. 교육에 대한 문턱이 낮아 졌고 엄청난 기회의 땅에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렇게 힘이 들까. 청년들의 일자리 문제는 날로 심각해지고 소수 이익 집단의 만행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다. 평범하고 성실한 집배원 아저씨들은 과로로 돌연사하고 있다. 누군가의 희망이고 사랑이었을 사람들이 여러 명 한 순간 자신도 모르게 쌓인 피로 때문에 예측 없이 죽음을 맞는다.

 6월 민주 항쟁이 벌어지던 대한민국은 지금 어디쯤에 있을까. 격변하던 시기를 지난 대한민국에서 나는 어디쯤에 있을까. 인간은 여전히 자격 없이 인간을 죽이고 나는 잘 산다. 청와대 문건유출 사건으로 조사를 받던 경위는 자살했다. 그것은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다. 누군가의 뱃속에서 10달을 사랑받고 태어난 금쪽같은 아들이 박근혜의 비밀 때문에 죽었다. 어차피 드러날 사실이었고 하루아침에 일국의 대통령과 잘나가던 비선실세는 초라한 모습으로 구치소에 있는데 망자의 숨결은 되돌아오지 않고 어미의 가슴만 타들어 간다. 그런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나는 너무도 많은 물건을 소유하고 있으며 부모님의 등골을 빼먹으며 잘 살고 있다. 갖가지의 파운데이션과 립스틱이 있고 충분한 옷가지를 갖고 있다. 가끔 무료해지면 카페에 가서 4, 5천 원 하는 음료를 시켜서 책을 읽거나 영상을 본다. 그리고 고상하게 앉아서 심각한 표정으로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 작품에 빠져서 몇 시간이고 자리에 앉아 있다. 가끔은 아는 사람과 만나 근사한 식당에 가서 7, 8천 원 하는 밥을 먹고 자리를 옮겨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차를 한 잔 하며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그리고 오늘 만난 사람과 나눈 이야기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그래도 영 혼자 있는 기분은 아니라서 오늘은 그래도 알찬 하루였다. 그러면서도 가방에서 오늘 지출한 돈의 영수증들을 꺼내 쓰레기통에 버리며 쉽게 쓰인 돈을 보고 잠깐 후회한다. 그러다 돈을 아끼다가 소중한 내 주변의 사람들을 잃으면 어떡하지 하고 서글퍼진다. 여하튼 나는 조금 슬플 뿐이지 잘 먹고 잘 산다. 너무 많은 물건을 소유하고 노력 없이 많은 것을 얻었고 계산해보면 너무 많이 움직이지 않고 있다. 그런 내가 나 아닌 다른 것의 죽음을 보고 슬퍼한다.

 잘 살고 있는 내가 6월 민주 항쟁 당시의 청년들이 거리로 뛰어 나가는 모습과 그들의 죽음을 본다. 너무 이상하다. 거리에서 격렬하게 무슨 말을 부르짖던 사람, 헝클어진 머리로 경찰에게 끌려가던 사람, 희고 여린 피부에 짙고 붉은 쌍코피를 흘리던 사람들의 살의에 가득 찬 눈빛들과 마주할 때면 섬뜩하던 나. 나태한 나의 등줄기에 솟아오르던 독기의 욕구. 그러나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용산참사 당시 옥상의 화염을 바라보던 군중 속에서 저기에 내 어머니가 있어요 라며 흐느끼던 남자의 음성을 들으며 나는 울음이 터져 나왔다. 최근 삼성중공업 크레인 사고로 동생을 잃은 남자는 자신은 어두운 그림자를 봐서 옆으로 피했고 크레인에 깔려 죽은 젊은 동생은 도면만 보고 있었다며 흐느꼈다. 그 사고는 회사가 돈을 아끼려고 위험한 현장에서 협력업체 직원을 일하게 해서 생긴 것이었다. 그 남자의 음성을 들으면서도 나는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얼마나 야비한가. 나의 눈물은 얼마나 파렴치하고 무책임한가. 그 죽음들을 보며 내가 할 수 있는 건 원룸방에서 TV를 보며 고작 눈물이나 흘리는 것이었다. 억울한 죽음들에 대해 정부를 비판하면서 나는 과연 아무런 책임이 없을까. 그들을 죽인 것이 나는 아니었을까, 그 타인은 혹시 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국민은 정부를 믿지 못하고 정부도 국민을 믿지 못하는 사회는 힘 있는 사람들의 살인이 쉬워진다. 불신의 사회에서 인간은 죽음 앞에 수단이 된다. 사회의 온갖 문제들로 인해 죽는 사람들을 보면 자꾸만 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나보다 어린 나이의 청년이 지하철에서 홀로 공사를 하다가 죽었을 때 나는 대학이 왜 이렇게 재미없을까 불평하며 강의실에서 지루함을 참고 앉아 있었다. 나는 왜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듣기 싫은 수업을 듣고 학점을 받아야 하며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땅에서는 아무도 봐주지 않자 옥상 등의 높은 곳에 올라 목숨을 걸고 농성하는 사람들을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무고한 죽음이 벌어졌던 장소에 가서 그들의 한(恨)을 풀어줘야 할 것 같다. 진도의 그 바다와 이른 아침 구의역에서 완성되지 못한 죽음을 위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기억하는 것이다.

 4. 온전한 죽음: 자연과 문학과 사랑

 자의든 타의든 예기치 못한 죽음은 온전하지 못하다. 갑작스러운 죽음과 완성되지 못한 삶에 노출되어 있는 인간은 늘 스스로 충만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연과 문학에 닿아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죽음 앞에 단단해지기 위해 망가진 우리 신체를 생태학적 사유를 통해 정화시켜야 한다. 자연과 인간은 하나다. 땅에서 생기고 땅으로 돌아가는 것들의 젖은 온기는 우리들 마음속을 파고든다. 온도가 없는 냉정한 물건들에게는 느낄 수 없는 어떤 동질감이 자연에 있다. 인간과 비슷한 구조와 리듬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자연은 인간과 양방향이다. 반면 물건과 인간은 한방향이다. 물건은 사용하다가 버리고 없앨 수 있으며 인간의 손아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인위적인 물건을 많이 사용하면 인간은 외로워진다. 대상의 반응이 없는 삶은 지쳐버린다. 일방적인 삶을 정화하기 위해서는 자연적인 삶이 필요하다. 그래서 흔히 자연적 소재는 인간을 힐링시킨다. 힐링과 함께 주고받을 수 있는 소통의 능력은 자연에게 먼저 배워야 한다. 갈수록 다양해지는 시대에 소통과 화합은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그 선행 작업을 자연을 보고 배울 수 있다. 인간과 자연이 살고 있는 집이 위험해지고 있기 때문에 생태학이라는 학문은 다방면의 학문으로 퍼지고 있다. 자신에게 맞는 분야에 생태학적 사유를 융합시키는 것도 학문의 자연적 정화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길을 가면서도 많은 존재와 소리 없이 대화한다. 학교 가는 아침에는 까치가 단골 대화 상대다. 식물이나 동물에게 마음속으로 말을 건네는 버릇은 아마 어릴 적부터 그랬던 것 같다. 읍내에서 산을 하나 넘어 가면 바다가 있는데 모래사장에 앉아 바다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길가에 있는 집들이 밖에 화분을 내어 놓으면 그곳을 지나다 괜히 한 번씩 손으로 모듬어 주시던 할머니 뒤를 따르면서도 꽃은 예쁜거구나 생각하며 따뜻함을 느꼈다. 한 번씩 내 말을 들어주는 풀잎, 강아지들에게 고맙다. 자연은 내게 친구이고 삶의 주변이다. 들떠 있는 나를 동요 없이 받아주는 존재들에게 보답할 길은 나도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순리대로라면 당연히 그렇게 되겠지만 육신을 잘 사용하다가 자연 속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는 날에 무한한 경의를 표한다. 그래서 나에게 죽음은 중요하다.

 슬픔의 신성화와 삶에 대한 자존적 의문: 시(詩)

 
세상의 온갖 슬픔은 나에게로 온 것 같은 유리 같은 나의 심성이 버거울 때가 있다. 하나의 개체가 감당하기 어려운 세상살이에서 인간에게 무한히 허락된 사치는 슬픔이다. 현대사회의 낯선 속성은 기쁨을 무한히 창조해낼 수 없게 하지만 슬픔만은 개인에게 마음껏 누릴 수 있도록 허용되어 있다. 나에게로 침잠하여 슬픔 속에 있을 욕망에 더해 나를 무너뜨릴 수 있는 권리. 그 간극을 견뎌 내는 것이 삶이다. 이때 시(詩)는 전자에서 후자로 비약할 수 있는 위험성에 멈춤을 선사하고 악하고 비극적인 슬픔을 신성하게 만든다. 우리는 왜 시를 쓰고 읽어야 하는가, 시적인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은 곧 나에 대한 물음이다. 나는 왜 존재하는가,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에 대한 총체적 함축이 하나의 시에 담겨 있다. 짧은 문장과 활자들을 머금고 굴리며 삶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오로지 나에게로 향해 있으며 이때 나는 자존적인 인간으로 존재한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존엄한 삶을 살아내는 순간 나는 어떠한 죽음으로부터도 해방된다. 대부분의 것에 슬픔이 스미어 있는 현대사회에서 이러한 순간은 신성해진다. 시(詩)는 현대사회의 비인간적인 체계성을 부정하거나 비판하며 당당한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신성한 영역이다. 인문학적 사유의 중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있는 그대로 슬픈 세상을 마주하고 당당히 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유비적 사고는 온전한 죽음을 가능하게 한다. 모든 것이 슬픈 오늘과 내일에서 시는 인간의 슬픔을 신성해질 수 있게 하고 삶에 대한 자존적인 의문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시(詩)를 통해 나의 마음을 타인에게 전하는 행위는 슬픔의 신성화와 자존적 삶을 위한 것이며 이는 나의 죽음을 온전하고 정당하게 해준다.

 5. 사랑의 가치와 죽음

 사랑(amour)을 라틴어로 아모르(amor)라고 한다.

 그러니 죽음(mort)은 사랑에서부터 비롯되는 것.

 그리고 그 앞에는 가슴을 물어뜯는(mord) 근심, 슬픔, 눈물, 계략, 죄악, 회한(remord)이 있나니…….

- 사랑의 문장(紋章)

『적과 흑』-스탕달 中

 

 사랑이 있어 생명이 태어났다. 태어났기 때문에 죽는다. 사랑은 좋은 것이다. 욕망의 집합체이더라도 사랑은 좋은 것이다. 머물러 있지 않고 발현하는 삶은 자연과 닮게 되어 싱그러워진다. 그러나 사랑으로부터 빚어질 고귀한 죽음 이전에 누군가의 가슴을 물어뜯는 근심과 슬픔, 눈물, 계략, 죄악, 회한이 일방적으로 넘쳐흐른다면 진정한 죽음은 없게 된다. 이 생(生)에 죽지 못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가. 죽지 못한 사람들, 죽지 않은 사람들의 한(恨)은 누구의 몫인가. 어딘가에 남아 있을 죽음의 봉오리를 위하여 우리 모두는 각자 존엄한 죽음을 실현해야 한다.

하지은(영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4)  pressyu@y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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